모기를 증오하며 21 -소나기-

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by 박동욱

소나기

소나기는 여름에 자주 있는 현상으로 갑자기 쏟아지다가 금방 그친다. 보통 취우(驟雨)라고 부른다. 장석남은 「소나기」에서 “… 이 땅에 팍팍/이마를 두드리다 이내/제 흔적 거두어/돌아간/오후 한 때/소나기 행자(行者)들/쫓아간/내 영혼/…”이라 하여 소나기가 지나고 간 오후를 그렸다. 일본의 4대 거장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驟雨」(1956)는 부부의 권태와 갈등을 잠시 지내가는 소나기에 빗대고 있다. 여름철 타들어 갈 것 같은 더위에 지칠 무렵, 쏟아지는 소나기는 그 자체로 여름 한 철을 버틸 힘을 주곤 한다.




바람에 사립문이 쾅 닫히자 제비 새끼 놀라고

소낙비 들이치니 골 어귀 어둑해지네.

푸른 연잎 삼만 장에 한꺼번에 쏟아지자

후드득 온통 갑옷 부딪는 소리로다.

風扉自閉燕雛驚 急雨斜來谷口平

散入靑荷三萬柄 嗷嘈盡作鐵軍聲

-노긍(盧兢, 1737-1790), 「소나기(驟雨)」


1구에서 3구까지는 소나기의 기세가 점점 세차게 되다가 4구에서 강렬한 소나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점증법(漸增法)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에 따라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립문이 갑작스런 세찬 바람에 일시에 닫히자, 그 소리에 어미 기다리던 제비 새끼들은 놀란다. 그런 뒤 골짜기에서 먹장구름 밀려오더니 세찬 비가 들이쳤다. 곡구평(谷口平)은 직역하면 골 어귀가 평평해졌다는 의미다. 보통 때는 지형의 돌출된 모습이 보이는데 구름에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연못의 위치는 적어도 시인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기 집이나 자기 집 담장 너머로 보아야 한다. 수많은 연잎에 소낙비가 쏟아져 내리자 물화살과 연잎 방패 사이에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다. 피 한방울 나지 않고 누구 하나 다치지 않는 자연의 대살륙전이다. 그러나 해만 뜨면 언제 치열하게 싸웠나는 듯 화해하고 방패와 칼을 금세 거둔다.


나루세 미키오, 취우.jpg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취우


나무마다 부는 훈풍에 잎새가 너울대니

몇 봉우리 서쪽에는 비 짙어 새카맣네.

쑥보다 더 새파란 청개구리 한 마리가

파초 끝 뛰어올라 까치처럼 울어대네.

樹樹薰風葉欲齊 正濃黑雨數峰西

小蛙一種靑於艾 跳上蕉梢效鵲啼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소낙비[驟雨]」


나무들에 따순 바람이 불어오니 잎새들이 일제히 뒤집히며 소리를 낸다. 소나기가 내린다는 신호탄이다. 소나기는 봉우리 몇 개를 순식간에 뛰어넘어 빗줄기를 쏟아낸다. 삼라만상은 빗소리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바로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개구리가 나와서는 비가 온다고 경보를 하듯 엄청난 성량으로 울고 있다. 대자연에 맞서는 인간의 악다구니 같기도 하다. 미물이라도 살아있다는 외침은 이렇듯 거룩하고 아름답다. 흑과 청의 색채가 대비되어 더욱 그림같은 풍경이다.




드센 바람 소나기 몰아오더니

앞 기둥 빗줄기에 온통 젖었네.

폭포처럼 처마 따라 떨어지었고

여울처럼 섬돌 둘러 마구 흘렀네.

이미 무더위 싹 씻어 없애버리니

다시 시원한 기운 많이 난다네.

저물 무렵 먹구름 걷히고 나자

옷깃 풀고 밝은 달 마주하였네.

亂風驅驟雨 霑灑滿前楹

飛瀑緣詹下 流湍遶砌橫

已滌炎威盡 還多爽氣生

向夕陰雲捲 披襟對月明

-허적(許�), 1563~1640), 소나기[驟雨]


소나기가 들이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폭포처럼 여울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언제 그랬냐 싶게 더위는 사라지고 시원한 기운을 만나게 된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소나기처럼 한바탕 몰아치고 지나갈 뿐이다. 어느새 막막하던 먹구름은 걷히고 밝은 달을 마주할 때가 다가온다. 티끌 마음과 속된 기운을 씻어버리면 청정한 마음이 찾아온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셈이다. 이 시는 소나기를 통해서 마음이 한 소식을 깨달은 단계를 말하고 있다.

노자에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않는다[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라 하였다. 소나기는 예상키 어렵지만 금세 그친다. 비가 쏟아져 내리면 잠시 피해 있으면 되거나, 형편이 된다면 감기 정도는 각오하고 그저 온몸으로 맞으면 된다. 비가 그치면 세상은 달라진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청량해 지고 마음은 맑아진다. 매일매일 좋은 날[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햇빛이 쨍쨍 나는 날도 소낙비가 내리는 날도 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날이다.


일일시호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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