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를 증오하며 24 -낮잠-

한시로 보는 일상의 재발견 –자음과 모음 근간-

by 박동욱

낮잠


공자는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자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다고 강하게 책망한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에 나온다. 정말 낮잠이 그렇게 나쁜 것일까?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30분의 낮잠이 밤의 3시간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점심 식사 후 30분의 낮잠을 챙겨서 꼭 잤던 덕분에, 매일 3시간씩 더 일할 수 있었던 셈이다. 처칠이나 피카소도 낮잠을 즐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앞 산 내리던 비가 막 개자마자

누각에 푸른 기운 스미는구나.

숨은 사람 맑은 대낮 자는 동안에

살구꽃이 가끔씩 저절로 졌네.

前山雨纔歇 蒼翠映小閣

幽人眠淸晝 杏花時自落

-박준원(朴準源, 1739-1807),「낮잠(午睡)」


비가 개이자 숲의 푸른빛이 더 짙어져 누각까지 스미는 것만 같다. 이때야말로 낮잠을 청하기에 가장 좋을 때다. 잠에 들자 살구꽃이 한 잎 두 잎 땅으로 살포시 떨어진다. 나 없어도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겠지.


발 그림자 방 깊숙이 드리워가고

연꽃 향기가 솔솔 풍겨 오누나

홀로 자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오동잎에 후드득 빗소리 나네.

簾影深深轉 荷香續續來

夢回孤枕上 桐葉雨聲催

-서거정(徐居正, 1420∼1488),「낮잠에서 깨어[睡起]」


얼마나 잠들었을까? 발 그림자는 방 안 깊이 옮겨져 있고, 연꽃은 어데서 피어 있는지 향기가 풍겨 나온다. 아직도 노곤하게 잠이 다 깨지 않았는데 빗줄기가 오동잎을 때려대니 그 소리가 요란하다. 꿈결에서 하나씩 의식이 돌아온다. 시각(視覺)에서 시작해서 후각(嗅覺)으로 옮겨갔다가 청각(聽覺)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낮잠 밀레.png


책 읽지 않은 지가 이십 년 되었는데

사람들 똥똥한 배 비웃어도 내비뒀네.

지금 다시 아들놈을 게으르게 내버려두니

긴긴 날 서창 아래 주구 창창 낮잠 자네.

不讀書來二十年 從人笑我腹便便

如今更遣兒童懶 永日西窓事晝眠

이수광(李睟光), 「아들 녀석이 낮잠을 자기에 장난삼아 쓰다[豚兒晝寢戲書]」


20년을 허송세월 하다 보니 나온 것은 뱃살 밖에 없었다. 아들놈도 자신을 닮았는지 게을러 빠져서 틈만 나면 낮잠을 잔다. 아들을 견책하려고 쓴 시가 아니니, 심각하게 읽을 것은 없다. 무언가 치열하게 산다는 것도 또 다른 집착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새근새근 낮잠에 빠진 아이가 밉지만은 않다.


숲에 솟은 어린 죽순 푸르게 자라나고

유월의 맑은 바람 사방에 시원하네.

세상은 저 달팽이 뿔 다툼에 맡겨 두고

한낮에 북창에서 희황씨 꿈꾸었네.

抽林嫩籜綠初長 六月淸風四面涼

浮世任他蠻觸鬧 北窓晴晝夢羲皇

김수항(金壽恒), 「낮잠[晝眠]」


죽순은 자라나고 바람은 불어댄다. 천지자연의 조화를 보고 있으면 번잡스런 세상사는 자연스레 뒷전이 된다. 안달복달 살 필요가 없다.『장자』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촉씨(觸氏)라 하고, 달팽이의 오른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만씨(蠻氏)라 한다. 때때로 서로 영토를 다투어 전쟁을 하는데, 쓰러진 시신이 수만 명이었다.”라 나오니, 사소한 일로 반목하며 크게 다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희황씨(羲皇氏)는 태고 시대의 임금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이때에는 천하가 말할 수 없이 태평하였다고 한다. 낮잠에 빠져드니 꼭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낮잠을 청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김춘수는 「낮잠[午睡]」에서 “청개구리/ 토란잎에서 졸고// 해오라기/ 깃털만치나/ 새하얀 여름 한낮// 고요는/ 수심(水深)보다/ 깊다.”라 하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한낮의 꿈을 잘 묘사하고 있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은「6월 17일 낮잠에서 깨어[六月十七日晝寢]」에서 “말이 마른 삼태기 깨물어 먹는 소리에 낮잠에서 깨고보니, 꿈속에선 비바람 되어 파도가 강 물결 뒤집어댔지.[馬齧枯箕諠午枕, 夢成風雨浪翻江.]”라고 하였다. 꿈속에서는 비바람이 세찬 파도를 일으키던 소리였는데, 잠에서 깨고 보니 말이 여물을 얻어먹지도 못해 마른 삼태기를 먹던 소리였다.

낮잠은 그 자체로 한가하고 평화롭다. 그래서 낮잠은 바쁜 일상에 가지는 휴지(休止)이며 충전이다. 낮잠에서 깰 때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아침에 잠이 깰 때와 사뭇 다르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낮인지 밤인지 모를 잠깐의 착각이 아직 살아있다는 자각으로 바뀐다. 복잡한 일들은 접어놓고서 낮잠에 잠시 몸을 기대면, 나머지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기곤 한다.


낮잠 꼬마.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기를 증오하며 23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