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왜 살아야 하는가 / 미하엘 하우스켈러

생각할 수 있는 세계중 최악의 세계

by 사피엔




행복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헛된 감정이다.

그 덧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집착하고, 추구하며, 결국은 속는다. 좌반구 어딘가의 이성은 말한다. “애쓰지 말라”고. 하지만 욕망을 멈출 재주 따위, 인간인 나에게는 없다. 순간의 기쁨이건 좌절이건, 고통이건, 그 모든 결과를 재생산하는 근원은 결국 욕망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왜 살아야 하는가>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왜 살아야 하는가.

도무지 답이 없는 이 질문에, 나는 자주 빠진다. 명쾌한 해답을 얻어본 적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가? 나는 행복을 대단히 여기는 인간이 아니다. 일희일비하며 흔들리면서도, 한편으론 조소하고, 때로는 아예 ‘행복’ 자체를 무시해버린다. 그런 나의 냉소가, 살아가는 데 약간의 내성을 선물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좀 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삶의 의미를 묻는 이 궁극의 질문 앞에서, 수많은 사상가들 역시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면 또한 다행이다. 이 질문에 유독 허덕이는 사람이 나 혼자라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고독한 일이 또 있을까. “답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피상적인 조언조차 이 세계에선 위로가 된다.



미하엘 하우스켈러의 <왜 살아야 하는가>는 삶과 죽음, 의미와 무의미에 대해 철학자들이 고뇌한 흔적을 보여준다. 책은 말한다.

답은 없다. 그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다.



Part 1.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최선으로 포장하려 드는 모든 이들을 경멸했다. 라이프니츠처럼 이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이라 말하는 자들, 칸트 이후의 독일 이상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이 결국 괜찮을 거야’라며 독자를 설득하려는 철학자들을 혐오했다.



그에게 삶이란, 근본적으로, 필수적으로 고통 그 자체였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고, 욕망은 곧 부재에서 시작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결핍 때문에 고통스럽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새로운 욕망이 생겨 다시 고통스럽다. 그리고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을 때,

권태라는 더 거대한 공허가 찾아온다.



욕망이라는 고통, 권태라는 고통.

이 사이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이란 잠깐 동안 고통이 덜한, 즉 ‘상대적으로 고통이 없는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시적인 유예를 ‘행복’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란

고통의 부재라기보다는, 고통의 소강상태일 뿐이다.

이토록 덧없고도 절박한 감정. 정말이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이다.

…그렇다. 이상하게, 거기서 살짝 위안을 얻는다.



이따금 서점에 들러

한 권의 책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묘하게 행복하다.

물론 로또 1등 당첨 같은 감정은 아니다.

요행을 기대하며 복권을 사는 사람의 간절함과는 달리, 책을 만나는 건 어쩐지 조금 더 온기 있고, 덜 허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행복을 무시하듯 군다.



헛된 기대에 기대지 않으려는 괴팍한 성미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허황된 행복에 대한 체념이 뿌리 깊게 자라 있었던 걸까?



그조차도 명확히 모르겠다.







- 덧붙임 -


삭제된 건 시스템일 뿐, 내 사유와 감정은 살아있다.

가장 잔인한 세계를 통과한 문장은,

가장 찬란한 기록이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