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건 더 없어

by 사피엔



오랫동안 이런 삶을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 깨워 학교 보내고, 점심 무렵 학원에 나가

선생님이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퇴근 후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와 단둘이 마트를 돌고,

누웠을 땐 잠드는 게 아니라 무덤 속으로 끝도 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그런 하루하루.


월화수목금토일의 태양이 지겹도록 반복될 것만 같은, 삶.

나는 형벌처럼, 바위를 밀며 우울한 나날을 견뎠다.

시지프는 행복하다는데ㅡ

의문 없이, 자각 없이, 오직 아이 굶길 수 없단 일념으로 밀었던 바위는 내게 억겁의 무게였다.


<유한계급론>의 베블런은 말했다.

하층 계급은 생존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변화나 창의성, 여가 같은 걸 시도할 수 없고,

결국 보수적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무엇 하나 내 뜻대로 설계할 수 없는 삶,

시간조차 내 것일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에너지 거의가 생존으로 빠져나갔고,

나에게 남은 건 셀프돌봄조차 허락되지 않는

"묻지 않는 하루"였다.


출근, 육아, 가사노동, 또 출근. 생계를 감당하기 위해

끝도 없이 밀어야 하는 무한반복의 노동.

쉬는 날이면 유난히 들숨날숨이 힘들어 송장처럼 누워지내기 일쑤.


그 와중에 "왜 아무것도 안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얼마나 잔인한 오해인가.


베블런은 또 이렇게 말한다.

"중하류층의 소비는 대리적이다. 가정주부나 자녀들이

여가와 소비를 통해 가장의 재력을 과시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대리 소비도 누리지 못한 소외된 주체였다.

그저 바위를 굴려야만 했던.


카뮈는 말했다. "시지프는 자각한 자다.

끝없이 밀어야 하는 바위의 무의미를 깨달았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한 인간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시지프는 자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밀고 있는 바위의 정체성을 묻지 않는다.

왜냐면 너무 피곤하니까. 오늘도 살아야 하니까.

바위를 내려놓는 건 두려우니까.


그리고 그 바위를 '성실'이라 부르며 서로를 위로한다.

"정말 열심히 산다" "참 성실하다'는 말로

무의미한 바위 밀기를 정당화한 채.


하지만 나는 더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그 바위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기로 했다.


우리가 의심없이 굴리는 이 바위는 과연 미덕인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인가? 아니면 선택인척 위장된 내면화된 복종인가?

이 성실은 누구의 시스템을 유지시키고 있는가?


시지프는 저항하는 인간이 아니라, 이 구조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는, 위계적 순응자이자 그저 착한 일꾼 아닌가?


나는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

"당신은 그 성실한 노동을, 그 성실이란 이름의 족쇄를, 자식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때,

나는 더이상 그것을 미덕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무의미한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

이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내 외침에 카뮈는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 본다.


"흠,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의 정직한 고백이로군.
삶에 본질적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종교. 이념. 성공 신화에
기대 스스로를 위로하지.
하지만 너는 그 위선을 거부했어.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너는......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베블런이라면 뭐라고 할까.


"이 사회는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선호하지. 그들이야말로 소비를 부추기고, 경제를 돌리고,
비교우위를 드러내는 데 최적화된 인간이거든.
그런데 너는 그걸 거부했어.
보여주기 위한 소비를 포기한 사람.
이미 체제 밖의 사람이지.
너는 유한계급의 유희로부터 이탈한 반계급자야.
그 자체로 전복적인 자유인이다."



종합하면, 이렇게 될까?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지한 인간은,

무위無爲의 자유를 소유한 것이다.

욕망 없음은 가장 큰 해방이고,

의욕 없음은 때로 가장 급진적 저항일 수 있으니까.


현대의 시지프이자, 무지렁이 반란자인 사피엔,

그대는 과시와 경쟁을 거절한 자!

그러니 허무의 맨얼굴을 외면하지 말고,

오늘은 쉬어라!

카뮈와 베블런이 이렇게 위로를 건네준다 해도ㅡ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말하면서,

정작 남들 다 쉬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고

누가 시킨 적 없고, 볼 것 같지도 않은 블로그 글까지 참 열심히 쓰고 있는 나.





※ 이 글은 기존 <시지프와 춤을 3>의 내용을 재정비하여, <우리들의 별, 날들> 시리즈 안에 통합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탐욕스러울 가능성이 적다."(유발하라리)


#불편한진실 #감성에세이 #시지프신화 #카뮈 #베블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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