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름은

나를 웃게하고 불안하게 하는 그대

by 사피엔


때론 기쁨의 시작이고,
때론 존엄의 끝자락인 것에 관하여 ㅡ


Ep.1


모처럼의 등반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지갑에서 잠자고 있던 5만 원 상품권 한 장을 핑계로 20분 거리 홈플러스 매장으로 달렸다. 우리의 등산은 콧바람, 휘날리니 치맛바람이요, 쇼핑이 본격바람 신바람이었다.


외국 대형 마트를 방불케 하는 남의 동네 마트엔 풍성한 볼거리가 한가득. 집어 들기로 맘먹으면 쇼핑 카트 두 세 개쯤은 순식간에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고픔을 불사하고 모던하우스 매장부터 휘돌고 나온 우리 카트엔 그러나 고무장갑 하나가 달랑.


1층 마트는 어땠을까, 우리 동네 슈퍼에도 있는 진라면, 어묵, 떡볶이, 스테이크, 맥주 그리고 각종 할인 상품들. 고르고 고른 물건을 싣고 언니와 난 각각 두 개의 계산대 앞에 긴 줄을 섰다.


네 봉지에 만원이라 해서 담았던 어묵은 2만 원이 넘었다. 빼주세요.


5천 원인 줄 알고 집어든 스테이크도 2만 원이 훌쩍 넘어, 아, 이것도 빼주세요.


결국 남은 건 어묵, 라면, 떡볶이.. 어째 전부 짠내 나는 술안주감. 그렇게 허무와 안주 거리만 손에 들고 그 먼 동네에서 귀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린 깔깔깔 한참을 웃었다.




사진 속 나는 1300m를 넘었지만, 마트 계산대 앞에선 5만원을 못 넘었다!




Ep.2


실컷 자고 일어나, 한나절 넘어 외출한 아들 녀석이 나가자마자 전화를 했다. 살짝 삐딱하게 받았는데, 사진 한 장 보냈으니 확인하란다.


열어보니, 문화상품권 1만 원짜리 다섯 장이 나란히 나란히. "도전 골든벨" 어쩌고 저쩌고, 지난번 학교에서 퀴즈 대회가 있었고, 3위를 했고.... 자랑하고 싶은 티가 잔뜩이다. 그 마음, 왜 모르겠나.


"잘했네! 상품권 엄마 줘! 현금 줄게"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저녁, 사소한 일들에 부글부글, 잠깐의 서러움 따위로 하루치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린 뒤, 작은 전등 아래서 가만히 바라본 허구의 산물, 5만 원 상품권.


우리 모두는 어쩌면 최종적으로 너를 얻기 위해 하루하루 힘겨루기 하는구나. 궁극의 기쁨이요 위안은 과연 너로구나, 생각한다.






Ep.3


들뜬 마음으로 샀던 명품 원피스. 막상 사이즈가 커서 5년째 묵히다 얼마 전 리폼샵에 맡겼다. 수선 다 됐으니 찾아가란 문자를 받고도 몇 주 째 수선비 5만 원이 새삼 아까워 미적거리는 중이다.


5만 원에 기뻐하고 그 한 장에 쩔쩔매면서, 고가의 원피스를 충동 구매하고, 옷장도 아닌 구석에 5년 씩이나 처박아둔 그 멘탈은, 또 뭔가.


다 뜯어고친 원피스를 찾아오면 그 옷은 이제 5만 원짜리가 되는 건가, 아님, 백화점 원가에 5만원이 더 추가된, 날개까지 달린 명품 옷이 되는 건가.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5만 원이라는 숫자에 걸려있다.

돈 때문에 억압받고 돈 때문에 해방되고,

결국 내 희노애락을 좌우하는 그대,

그대 이름은 오!!

오만원인가!




살다 보면 그럴 때 있다.
가진 건 오만원뿐인데, 마음은 열 가지 감정으로 터져버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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