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 중인 사피엔의 마지막 실밥들
ㅡ 들어가기 전
실뜨기라는 섬세한 세계를 어떤 작가님께 배웠습니다. 그분의 실이 하늘을 걸 때, 하필 저는 방바닥에서, 늘어난 속옷 봉제선을 꿰매고 있었죠. 그러다 문득, 그 분의 무늬 앞에서 조심스럽게 답가를 띄우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의 문장과 전혀 다른 결로, 걸어가보고 싶었거든요.
우린 각자의 무늬를 짓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무늬와는 다른 방향에서 시작된, 조용한 응답입니다. 이 작은 존경의 답가는, <불편한 사피엔스를 위한, 번외편>으로 1,2 회 정도 연재되다 사라지거나, 이사를 할 수도 있어요.
누군가의 아름다운 문장이 내게는 왜 이렇게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는지.
모 작가님의 글에서 실뜨기를 읽었다. 실 위에서 감정이 흐르고, 손각락이 말을 건네고, 긴장과 욕망이 무늬를 짠다 했다.
문장은 너무 고왔고, 나는 잠깐, 내 손을 내려다봤다. 늘어난 속옷 고무줄을 꿰매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 거긴 감정이 아니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실보다 긴 하루, 실보다 무거운 생존. 실뜨기는 순간의 예술이라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밥을 해야 했고, 카드값 날짜를 체크해야 했고, "이번 달까지만요"라는 학부모 문자를 견뎌야 했다.
그 작가님이 말한 '긴장의 언어'는 내게는 '다음 수업이 잡히지 않는 긴장'이고, 그분의 '의식의 조형'은 내게 '의식주의 조급함'이었다.
그분의 실이 '구조'를 짓는 동안, 나는 '봉제선'을 꿰맸다. 무늬보다 살림을, 감정보다 속옷의 탄력을 살렸다. 실이 엉키면 무늬는 사라진다지만, 산다는 건 애초에 무늬 따위 없이 엉키고 설킨 나날의 반복이다. 나는 고운 무늬를 짜는 손보다, 빠진 실밥을 붙드는 손으로 간신히 하루를 꿰매며 넘긴다.
그는 말한다. 감정은, 문장이 되기 전의 충동이라고. 나는 말한다. 내 감정은 이미 문자로 왔다고. '잔액 부족', '납부 기한 경과', '이번 달도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아름답진 않지만, 명확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언어다.
그 모든 긴장감 속에서, 나는 손가락이 아니라 허리 근육을 조절하며, 눈썹 사이 미간에 힘을 주며 버틴다.
그는 말한다. 실뜨기의 무늬는 완성되는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간다고. 맞다. 나도 안다. 내가 꿰맨 고무줄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걸. 며칠 뒤면 또 늘어날 거란 걸. 그러면 또 꿰매야 한다.
이 반복이 위대한 예술은 아닐지 몰라도, 이건 내 생존이고, 나만이 꿰맨, 유일한 무늬다.
그는 마지막에 썼다. "꿈속에서, 고작 실뜨기나 하고 있었다니."
나도 그 말 이해한다. 나도 종종, 고작 밥하고 빨래하고, 고작 출석 체크하고, 고작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 되면, 나는 또 밥을 하고 출근을 한다. 그게 내 대화 방식이고, 지구인이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이니까.
실뜨기는 찰나의 예술이다. 하지만 나는, 그 찰나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고무줄을 꿰맨다. 무늬 대신 생존을 잇기 위해. 그리고 이것이,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고매한 답가다.
- 비루라는 현실의 무게를 얹고 사는 지구인, 사피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