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시기라는 욕망에 대하여

by 이동훈

사람이면 질투와 시기를 하기 마련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도 있듯,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운이 나에게 직접적인 기쁨으로 다가오진 않는 듯하다. 친한 친구가 잘 되었을 때, 겉으로는 축하를 해주지만 속으로는 내심 불안해 할 수도 있으며, 독일어 ‘샤덴 프로이데’라는 말처럼 타인의 기쁨을 자신의 완전한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잘 되면 배가 아픈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점은 ‘나와 동일 선상에 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간다는’, 앞질러 간다는 일종의 불안감 때문에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고3의 상황을 들어보자. 학교에서도 전교 1등과 전교 2등이 있다면, 입시 결과 이들이 모두 동일한 대학에 가면 문제가 생기질 않겠지만, 전교 2등이 1등보다 좋은 대학을 간다고 가정하면 상황이 약간 달라진다. 늘 자신보다 발 아래라고 생각하던,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던 친구가 갑자기 자신보다 잘나게 되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 전교 1등에게는 자신이 느낀 기쁨보다는 질투와 시기가 엄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불완전하고 또한 본능과 욕망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타인의 기쁨이 우리에게 ‘100% 그대로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상 공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지인 관계도 그럴진대, 부모나 형제자매 관계에서도 종종 이런 감정이 수반된다. 그럴 때는 오히려 인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상대방과의 격차를 생각하지 말고,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 할 수도 있고, 약점을 보완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친구의 잘된 사례를 교훈 삼아 동기 부여를 받을 수도 있다. 에너지는 하나지만 어디로 뻗치느냐에 따라 작동되는 방식은 제각기 다양하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가 약할수록 타인의 행적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내가 이뤄놓은 것이 없고 처량한 처지일수록 더욱 그렇다. 친구의 ‘잘 지내냐는 말’ 한마디가 오히려 상처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럴 때일수록 멘탈을 잘 다듬고 추슬러야 한다.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항상 비극만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경험에 있어서 균형은 중립이다. 항상 진자 운동처럼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한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 인생을 살아간다고 가정해보면, 축하를 잘 해주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기쁨을 오롯이 축하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감화를 받지 않을까. 사건 사고가 만연하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행복을 오롯이 축하해줄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길러야 하는 능력일 것이다. 같이 공존하며 그 사람의 개성이 사회에서 존중받듯이, 나 역시 그 사람의 가치와 업적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제각기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여러 모양을 지닌 도형들이다. 삼각형도 있고, 사각형도 있고, 원도 있다. 어떤 면은 뾰족해서 다른 도형을 찌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은 부드러워서 다른 도형의 각진 부분을 품어 안을 수도 있다. 시기와 질투로 빚어진 미움보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을 생각하면서 타인을 대해보면 분명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두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곧이곧대로 전송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으며 글을 맺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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