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올라오려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차분히, 그리고 고요하게 관찰하면 힘을 잃는다.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듯, 분노나 슬픔이 밀려오면 내면의 웅크린 ‘나’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그동안 잘 살아와서 고맙다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시기와 질투가 될 때, 혼자와의 대화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경험한다. 때로는 좋은 감정을, 때로는 나쁜 감정이라고도 불리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낀다. 감정이 파도치듯 밀려오면 그것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를 직시할 수 있게 되고, 시간이 지나 추슬러지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진다. 신비로운 감정의 마법이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할 때, 옆에서 그 고민을 들어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이라면 느껴봤을 감정이 있다. 바로 내가 아닌 타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절대로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람이 느낀 감정을 내가 대신해서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곤 한다. 바람이 강풍이 될 수도, 미약한 바람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다르다.
상실과 이별, 슬픔과 애도처럼 긴 시간이 필요한 감정들은 섣불리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럽거나 힘든 감정들이다. 무거운 짐을 대신해서 들어주려던 타인이 혹시나 나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일상에 영향을 받을까 봐, 그 무거운 짐을 대신 안고 살아야 할까 봐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미안한 감정에 동반되는 슬픔과 이별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인가 보다.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누군가의 부재는 누군가의 존재로 채워질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힘든 감정을 마주하고 현생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 올려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머니의 애정이 담긴 잔소리, 진심이 수반된 멘토의 한마디가 모두 그런 것들 아닐까? 그 사람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그들의 조언이 말이다.
사람은 무인도처럼 홀로, 외딴 섬처럼 동그라니 놓인 채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테두리에서 협력과 화해를 바탕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적합하다. 영화 ‘김씨 표류기’,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와 같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생존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들도 결국에는 우리가 사회적 존재임을 역설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이 있기에 힘이 나고 타인이 있기에 위로받을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우리를 보살피는 누군가가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시대를 막론해 항상 인간 본질의 근원적인 핵이었다.
모두가 잘 살길 바라는 심정으로 마지막 문단을 써보자니, 조금은 착잡한 심정이 들기도 하고, 조금은 후련하기도 하다. 고통받는 이들이 주변만 둘러봐도 셀 수 없을 만큼 여럿 존재한다. 동물과 식물들도 협력해서 살아가는 판국에, 유독 현시대의 인간들만이 괴리되고 파편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게 보일 따름이다. 영국에서는 정책의 일환으로 ‘외로움부’를 개설해 이러한 시국을 돌파하려고 했듯이,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도 타인과의 협력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으로는 어렵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협력과 소통의 증진으로 말미암은 ‘상생의 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은 서로를 향한 애정의 시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