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미술관 정원 산책
우리들이 예술가에게 진정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수만큼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그 점에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드디어 로댕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로댕 뮤지엄은 파리에 방문하는 친구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는 미술관 중 하나입니다. 파리 7구, 앵발리드 옆 호당 뮤제(Musée Rodin). 언젠가 파리지엥 친구에게 로댕 뮤지엄이라고 했더니 절 대 못 알아듣더라고요. 나중에 호당 뮤제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뮤지엄 조각정원으로 들어서자,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조각의 표면을 따스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로댕의 생각속을 걷다
로댕의 대표작들이 고요히 숨 쉬는 이 정원은 마치 한 예술가의 내면을 산책하는 듯합니다. 정원 초입엔 묵묵히 사유하는 인간,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이 앉아 있고 한쪽에서는 ‘칼레의 시민들’이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서 있지요. 정원 중앙에는 40년간 미완성으로 남은 대작, 단체의 지옥을 형상화한 지옥의 문은 말해 모해, 압도적입니다.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로댕의 일화가 문득 떠오릅니다. 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에 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한동안 생계를 위해 은세공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가 조용히 충고했지요.
로댕, 눈에 보이는 나뭇잎만 만들지 말고,
그 안의 생명을 보게.
그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로댕은 그때부터 형태의 껍데기보다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이 아닌 속, 눈으로 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운 것이죠. 그 이후 그의 조각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손끝에서 돌은 더 이상 차가운 물질이 아니라 숨 쉬는 인간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단지 조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생각, 망설임, 욕망, 고뇌 같은 인간의 감정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댕미술관을 지금까지 서너 번 넘게 간 거 같아요. 어떤 날은 따스한 햇살이 정원에 내려앉고, 바람이 조각의 곡선을 따라 흘러가던 오후였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 옆 벤치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했고, 그의 생각이 내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습니다. 모든 사물은 각도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표정을 짓습니다. 조금 더 낮게, 혹은 멀리서 바라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들이 보이죠. 요즘 나의 키워드가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기’라서인지, 그날의 감상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였습니다.
이 모든 작품의 근원은, 로댕이 인간을 바라본 깊은 통찰에 있습니다. 그에게 조각은 돌이 아니라 감정이었고,
형태보다 내면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의 손끝은 인간의 영혼이 지나간 흔적처럼 살아 있습니다.
사랑, 예술, 그리고 이별
로댕이 남긴 글들을 찬찬히 읽으면서 한 예술가의 생각과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미켈란 젤로만큼이나 시대를 초월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그리고 한 때 그의 사랑이었던 여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 요즘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두 예술가입니다.
로댕의 작업실 한편에는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까미유 클로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또 누구보다도 고독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천재성을 발견하자마자 강렬한 예술적 불꽃으로 끌렸습니다.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예술의 불길만큼 뜨겁고 잔혹했지요.
이별을 앞둔 어느 시기,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의 얼굴을 조각합니다. 로댕은 젊은 시절의 까미유를 섬세하게 새긴 〈까미유 클로델의 머리(Head of Camille Claudel)〉에서 그녀의 눈동자 안에 남은 결연함과 슬픔을 동시에 새겼습니다. 대리석의 차가움 속에서도 그녀의 내면은 살아 있는 듯 뜨거웠지요. 까미유 역시 그에게 응답하듯,〈생각(La Pensée, The Thought)이라는 작품을 남깁니다. 반쯤 돌에 묻힌 얼굴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사랑과 상처, 그리고 예술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간절한 몸짓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돌 속에 묻으며,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했지만, 서로를 조각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랑은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들의 관계를 비극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두 예술가의 가장 깊은 대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말 대신, 조각으로 서로를 이해했으니까요.
로댕은 정부의 미술관 건립 허가가 나기 전 까미유 클로델을 위한 전시방도 따로 만들러 달라 요청을 했을 만큼 그녀의 재능에 대한 찬사를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그의 모든 작품을 정부에 기부하고 그가 살던 호텔이 지금의 로댕 미술관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지요.
사유의 공간, 그리고 환희의 기억
로댕 미술관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앵발리드의 금빛 돔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2024년 뜨거운 여름, 바로 그곳에서 파리올림픽 양궁 결승전이 열렸지요. 화살이 공중을 가르며 날아가던 순간, 그 장엄한 곡선이 마치 로댕의 조각선을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인간의 집중, 긴장, 그리고 해방. 예술과 스포츠는 그렇게 닮아 있었습니다. 둘 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 되는 찰나의 예술이니까요. 승리의 환호가 멀리서 울려 퍼질 때, 로댕의 정원은 조용히 미소 짓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뫼동으로
며칠 뒤, 파리 교외의 뫼동(Meudon)으로 향했습니다. 로댕이 말년을 보내며 작업했던 집, 그의 또 다른 아틀리에입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보인 안내문, “오늘은 리노베이션으로 휴관합니다.” 자세히 검색해보지 못하고 먼 길을 온 게, 무척 후회스러웠어요. 그래도 숨을 돌리며 닫힌 문 앞에서 이상한 평화가 스쳤습니다. 미완의 조각처럼, 미완의 여행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느낀 여행자로서 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흙냄새 속에서 나는 오히려 로댕의 ‘지옥의 문’을 떠올렸습니다. 끝나지 않은 고뇌가 예술이 되고, 멈춤 속에서 또 다른 시작이 피어난다는 것을요.
로댕의 조각 정원에서, 그리고 뫼동의 닫힌 문 앞에서 나는 완성보다 과정의 예술을 배웠습니다. 그의 작품처럼 우리 삶도 늘 미완이기에, 더 살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Nothing is ever finished — only begun again.”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시작될 뿐이다. 그날의 헛걸음은, 파리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완성보다 아름다운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이다.
에필로그))
생각하는 사람. 미국에도 있다고? 언젠가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나눈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인터넷도 뒤 저 보고 책 여기저기 찾아봤어요. 그러다가 로댕의 일기장에 로댕이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에 대하여 : 이 청동상은 곧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나는 일부러 이것을 비바람에 씻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찬란한 태양 광선 밑에, 혹은 희미하고 신비로운 여명 속에서 이 작품이 나타내는 효과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로댕은 그 자신이 만든 인물이 열렬한 현실성을 지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디까지나 진실에 대해 솔직하려고 마음을 쓴 이 예술가를 참 사랑하게 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