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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에 앉아 있으면 작가가 된다

카페 드 플로르와 마고 사이

by Sarah Kim
처음 파리에 왔을 때, 나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레 되 마고, 카페 플로르,
라 클로즈리, 라 로통드까지—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는 카페란 카페는 모두 찾아다녔다.”
앤 후드, 『내 인생 최고의 책』 중에서


마음과 몸이 살찌는 이 계절, 요즘 읽고 있는 책입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나는 왜 이 책에 끌렸을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소설 속 매기는 매일 카페에 앉아 하우스 와인을 마시며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기를,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우리 인생과 닮아서 일까요. 그 장면이 묘하게 내 기억 속 파리와 겹칠 때가 있어요. 파리에 자주 가는 카페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순간’을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파리의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사랑해 온 이 문장이 평범한 어느 날,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떠올랐어요.


숟가락이 커피 안을 휘젓고 다니며
프랙털 모양을 형성하던 우유 구름을
뽀얀 소용돌이로 흩어 놓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브는 문득,
커피 속의 우유가 마치
우주 속의 은하 같다고 생각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피용』 중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종종 커피 냄새와 함께 찾아온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늘어선 카페들을 쉽게 마주치게 됩니다. 하기사 요즘엔 우리나라가 더 그렇지만요. 아침 햇살 속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책을 읽는 파리지앵, 늦은 밤 친구들과 와인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 — 이 모든 장면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프랑스에서 ‘카페’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닙니다.

18세기부터 그것은 만남과 사유, 휴식과 창작의 공간으로

파리지앵의 일상 속 깊이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대학 강의실보다 더 진지한 토론이, 미술관보다 더 자유로운 상상이,

이 작은 테이블 위에서 태어나곤 했지요.


비가 가볍게 내리던 어느 아침엔 생제르맹 거리를 걷다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에 들렀습니다. 테라스는 젖어 있었고, 파리지앵과 여행자들이 섞여, 카페 안은 이야기 꽃으로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Les Deux Magots 가는 길


그날은 왠지 커피 대신 초콜릿을 마시고 싶었어요. 커피가 일상을 깨우는 일이라면, 초콜릿은 달콤한 휴식이니까요. 초록색 카페로고 티 팟에서 초콜릿을 하나 가득 잔에 부으니 달큰한 향이 올라왔습니다. 몸이 으스스 추웠는데 핫초코 한잔이 금세 몸에 생기를 넣어주었어요. 파리의 카페는 늘 그렇습니다 — 잠깐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위로 한잔을 마시고 나오게 되죠.


Les Deux Magots 에서


Les Deux Magots


몽마르트르에서 몽파르나스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구입한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

흑백의 ‘레 되 마고’ 풍경을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는 아직 근대화의 바람이 불기 전, 파리의 문화가 태동하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Paris Cafe 이야기 책에서


19세기 후반, 파리의 문화 중심은 몽마르트르 언덕이었습니다. 풍차와 포도밭이 있던 노동자의 동네가 물랭 루즈와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중심으로 화가와 시인, 배우와 철학자들이 모여드는 예술의 왕국으로 변했죠.


모든 핫한 장소가 색을 바래듯, 시간이 흐르며 무대는 남쪽으로 이동했어요. 도시의 확장과 함께 새롭게 떠오른 곳, 바로 몽파르나스 입니다. 이곳에는 지성의 광장, 소르본 대학과 에콜 느르말이 있었죠. 그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카페를 새로운 ‘살롱’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소르본 대학


한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실존을 논하던 그 자리에는

이제 철학자 대신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고,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생각을 기록합니다.


카페 레 되 마고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유의 공간’이에요. 단지 대화의 언어가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습니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에 ‘오늘의 철학’을 남기고, 누군가는 연인과 함께 ‘삶의 문장’을 나눕니다.


이곳의 공기엔 왜 일까. 여전히 사유의 향기가 나요.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아마 이런 거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 이라고요…


Café de Flore


Café de Flore


생각이 피어나는 창가


카페 드 플로르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빕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들이 세기를 넘어 겹칩니다. 이 두 카페는 말 그대로 시대의 초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헤밍웨이, 사르트르, 보부아르, 생텍쥐페리, 피카소, 앙드레 말로, 그리고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까지— 그들은 이곳에서 글을 쓰고, 사랑을 하고, 세상과 예술을 논하며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갔습니다.


플로르의 창가에서는 철학이 피어났고, 레 되 마고의 테이블 위에서는 사상이 향기로 변했으니까요. 그곳에서 오갔던 대화의 온도와 커피의 향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여전히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Café de Flore


삶의 의미는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커피잔의 반쯤 남은 온도 같은 곳에 있다.


나의 작은 파리, 나의 작은 쉼표


저에게도 이곳은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페’란 언제나 커피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으니까요.

그건 아마도 ‘멈춤의 기술’, 혹은 ‘사유의 리듬’ 같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 역시 여전히 도심 곳곳의 카페를 떠돌며

잠시 머물고,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커피잔 위로 몽글몽글피어오르는 김은 언제나 작은 영감의 신호처럼 느껴지니까요.


Shakespeare & Company Café


문장이 숨 쉬는 자리


센강 건너편, 노트르담 성당이 보이는 그곳.

책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공기마저 문장처럼 흐릅니다.

그때, 《에밀리 인 파리》의 한 장면을 떠올랐어요. 에밀리는 초콜릿 크루아상을 먹으며 말했지요.


Don’t be afraid to fall in love with Paris —
one sip at a time.
한 모금씩,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Shakespeare & Company Café


그녀의 말은 단순한 드라마 대사가 아니라, 파리의 리듬을 정확히 표현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언제나 ‘조금씩’ 사랑하게 만듭니다. 커피 한 잔씩, 거리 한 블록씩, 마음 한 칸씩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이야기한다


레 되 마고의 철학, 플로르의 사유, 셰익스피어 카페의 문장.

예술가들이 떠나고 여행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공간은 여전히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존재를 논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누군가 오늘의 일기를 쓰고, 보부아르가 글을 쓰던 테이블에서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어 꿈을 기록합니다. 현실속의 대부분의 시간은 관광객들로 붐비지만요. 모습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모두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니까요.



잔 속의 은하, 마음속의 파리


오늘은 행복한 주말, 알람에 맞춰 일어나는 평일과는 달리, 이날만큼은 천천히 나만의 아지트로 향합니다. 창가 자리, 약간의 햇살, 그리고 라떼 한 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신선한 커피 향처럼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생각이 부드럽게 깨어납니다. 이곳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가장 달콤한 휴식의 공식이니까요. 파리의 카페가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겁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카페인이 아니라, 멈춤의 감각을 마십니다.

커피는 일상을 깨우고, 초콜릿은 삶을 달콤하게 만들죠.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살아 있음’의 예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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