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미술관을 걷다 — 번외 편
Pont de Bir-Hakeim 퐁 드 비르하켐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걷다
여름의 파리는 변덕스러운 만큼 다채롭습니다. 구름이 흘렀다가 어느 순간 햇살이 쏟아지고, 정오의 공기는 흐렸다가 빛나기를 반복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 메트로 6호선을 타고 Pont de Bir-Hakeim 비르하켐 다리로 향했어요. 창밖으로 스치는 에펠탑의 철골 구조가 마치 한 장면씩 넘겨 보는 필름처럼 지나갈 때, 그때만큼은 아—내가 지금 파리에 있구나, 실감을 하곤 해요. 무엇보다 이때는 파리올림픽이 끝난 직후였으니까요.
그리고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이 겹칩니다. Pont de Bir-Hakeim 비르하켐 다리는 파리에서도 독보적인 장소중 하나랍니다.
거울을 열자, 파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영화 〈인셉션〉에서 제가 가장 숨을 멈추고 본 두 장면이 있어요. 파리를 사랑해서일까요. ^^ 아리아드네가 처음 꿈의 세계를 설계해보일 때, 그녀는 파리의 거리를 그대로 복제해 세운 뒤, 그 도로를 하늘 방향으로 접어 올립니다. 아름다운 카페와 아파트들이 종이 도면처럼 탁! 하고 꺾여 올라가던 순간.
파리라는 도시가 현실의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 하늘과 나란히 놓이는 장면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파리다운 아름다움이 있었죠.
그리고 더 숨을 멈추고 본 장면은 바로 오늘의 이 장소. Pont de Bir-Hakeim 비르하켐 다리 아래에서 펼쳐진, 아리아드네의 ‘거울 소환’ 장면입니다.
철제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 상징적인 다리 아래, 아리아드네는 마치 무대 장치를 펼치듯 양쪽으로 거대한 거울 두 개를 꺼내 세웁니다. 거울은 파리의 골목, 다리의 기둥, 두 사람의 걸음과 숨결까지 모두 그대로 반사시키며 순식간에 무한 반복되는 미로를 만들어냅니다. 거울 하나가 현실을 비춰주었다면, 거울 둘은 현실을 끝없이 복제하고 변주하는 또 하나의 세계였지요.
반복되는 아치, 달리는 지하철이 지나가기 직전의 진동, 기둥 사이로 이어지는 깊숙한 반사 공간. 그 모든 것이 합쳐져 현실의 파리를 바탕으로 만든 무한한 꿈의 복도라는 감각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거울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감정이 세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주는 은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은 파리를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구조와 질서를 가진 하나의 거대한 도면으로 보게 만들어요. 우리가 매일 걷는 도시도 사실은 마음이라는 설계자가 움직일 때 얼마든지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듯이요! 오늘 내가 본 세상은 나만의 프레임으로 재창조 되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비르하켐을 걸을 때는 거울도 없고, 설계도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죠. 또 흐렸다가 다시 밝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센강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더 영화적이라고 할까요.
영화는 파리를 ‘꿈으로 만든’ 공간, 하지만 현실의 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숨결을 가진 공간이니까요. 영화 속 아리아드네처럼 세계를 접어 올릴 순 없었지만 대신 제 안의 생각과 감정이 천천히 재배열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실은 접히지 않아도, 마음은 얼마든지 접히고 다시 펼쳐지니까요.
좌우지간 아리아드네가 처음으로 현실을 접는 법을 배우던 그 장면, 도시가 위로 접히며 뒤틀리던 기묘한 미장센. 그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이 다리는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성지가 되었습니다.
〈인셉션〉 속의 파리는 누군가의 꿈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지만, 제가 걸었던 파리는 누군가의 ‘삶’으로 채워진 풍경이었죠.
다리 기둥 사이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햇빛, 그 사이를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길어진 그림자, 멀리서 고요히 서 있는 에펠탑의 윤곽. 카메라도, 배경음악도 없었지만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장면이었습니다.
파리 미술관을 걷다 — 프레임을 바꾸는 일
미술관에서 여러 작품들을 바라보았다면, Pont de Bir-Hakeim 비르하켐 다리에서는 도시가 스스로 프레임이 되어 움직이는 예술을 봅니다.
여운, 영화는 끝나도,
장면은 마음에 남는다
Pont de Bir-Hakeim 비르하켐 다리를 떠날 때, 구름이 다시 걷히며 햇살이 센강 위에 반짝였습니다. 썬크림을 대충 발랐는데 파리의 여름 햇살이 너무 강렬해 살이 새까맣게 탔어요.
영화의 장면은 스크린에서 끝나지만 여행에서의 장면은 마음속에 남아 오래 재생됩니다. 그곳을 걷게 될 때마다 새로운 ‘나의 장면’이 쌓이니까요. 파리 미술관을 걷던 페이지처럼 이 순간도 다른 색깔로 자리 잡길 바래봅니다. 주말 밤에는 인셉션을 다시 봐야겠어요. 다행히 쿠팡 플레이에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