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다운 시간여행, 코냑 제이 뮤지엄
가장 파리다운 시간여행을 하고 싶을 땐
마레지구에서 만나요.
코냑 제이 뮤지엄 가는 길
“파리에 가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지인들이 종종 물어요. 저는 잠시 웃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수많은 곳 중에 한 곳을 고르라면… 흠. 그래도 르 마레 Le Marais!
왜냐고요? 이곳은 걷기만 해도 설렘 뿜뿜이니까!
마레는 파리의 낭만이 줄줄 흘러나오는 힙스터들의 동네입니다. 프랑스를 여행할 때면, 멀리 한국에서 장장 13시간을 날아왔는데 갈 곳은 다 가봐야지! 도장 깨기 같은 여행이 슬슬 고단해지는 때가 옵니다. 그렇지만 마레에서 만큼은 당신이 바쁘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돼요. 골목 하나를 돌기만 해도 이 여행이 조금은 더 깊어지고, 카페에 앉아 있기만 해도 원래 내 일상을 사는 것처럼 마음이 보드랍게 풀리니까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명 관광지처럼 이목을 끌려고 애쓰지 않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 도시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작은 미술관, 오래된 저택의 그림자, 조용한 정원, 그리고 무심하게 빛이 흘러드는 오후까지— 모든 장면이 ‘너, 오늘 파리와 조금 더 가까워졌어’ 하고 속삭이는 것 같죠.
그래서 누가 ‘나만의 파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면, 저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흠, 여행기의 첫 장에는 마레를 적어보세요.
목적 없이 걸을수록 더 사랑스러운 동네니까요.
‘마레’는 프랑스어로 늪, 습지를 뜻합니다. 본래 이곳은 물이 많이 고이고 사람이 살기 어려웠던 지역이었다고 해요. 13세기 무렵부터 대대적으로 늪을 메우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고, 16–17세기에는 파리 귀족들이 하나둘씩 이곳에 호텔 파르티큘리에 Hotel Particulier, 귀족저택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늪이었던 땅이 가장 세련된 계층이 모여 사는 파리의 중심지로 바뀐 것입니다.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
귀족의 삶이 숨 쉬던 파리의 첫 계획 주거지
마레의 상징 중 하나는 단연 보주 광장입니다. 파리 최초의 ‘계획된 광장 주거단지’로, 원형 아파트처럼 동일한 구조의 귀족 저택들이 사방을 둘러싼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이곳은 귀족들이 살기에 최적화된 구조였죠 사방이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중앙에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정원은 말해 모해요. 각 저택의 균일한 붉은 벽돌과 슬레이트 지붕이 매력적입니다. 과거 귀족들이 누리던 ‘균형 잡힌 생활의 미’가 여전히 광장 전체에 흐르고 있어요. 이 광장의 분위기가 마레 전체의 정서를 만들었고,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져 패션, 갤러리, 서점, 카페들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코냑제이 미술관(Musée Cognacq-Jay)
귀족저택에 숨겨진 18세기의 우아함
마레를 걷다 보면 보주 광장 근처의 번잡함이 잦아들고 작은 골목 안으로 깊어질수록 조용한 기품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 끝에서 만나는 곳이 바로 코냑제이 미술관(Musée Cognacq-Jay)입니다. 술 이름 코냑이 아니에요^^
이 미술관이 자리한 16세기 건물 도농 저택(Hôtel Donon)은 중세-근대 사이에 지어진 귀족저택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주인, 사마리텐 백화점을 세운 에르네스트 코냑은
18세기 예술의 ‘우아함’에 깊은 매혹을 느낀 수집가였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부를 자랑하려고 과장된 예술이 아니라, 한 시대의 취향과 품격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티에폴로의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그뢰즈의 초상화들, 라 투르의 파스텔, 18세기 장인의 손길이 깃든 가구와 미니어처들…
이 모든 것이 큰 전시장 대신 비밀스러운 18세기 저택의 어느 살아 있는 방들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마루 바닥의 소리를 듣노라면, 마치 18세기 사람의 집에 초대받은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저택 뒤편의 작은 정원
마레의 오후가 쉬고 있는 자리
도농 저택 뒤편에는 작고 조용한 프라이빗 정원이 있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호젓하게 마레의 오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말그대로 시크릿 정원입니다. 부드러운 잔디와 다듬어진 나무들, 조용한 흙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귀족저택의 시간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작은 정원 덕분에 코냑제이 미술관 주변은 늘 바람이 잘 통하고, 어떤 정숙한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답니다.
마레지구
오래된 시간과 현대감각이
나란히 걷는 동네
이처럼 마레는 17세기 귀족저택이 묵묵히 역사를 품고 있고, 바로 옆 골목에서는 청년 디자이너들이 팝업 스토어를 열고, 유대인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샌드위치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카페에서는 노트북으로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와 산책 나온 파리지앵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요.
마레에서 얻는 생각 하나
그래서 마레를 걸을 때는 파리의 현재형을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요. 늪지에서 시작된 동네가 귀족의 삶을 품고, 전쟁과 변화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가장 감각적인 파리의 동네가 되었다는 것. 그 변화의 스펙트럼이 제게 영감을 주거든요. 도시도 사람도 시간이 쌓이며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걸 마레가 직접 보여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곳을 “내가 사랑한 마레”라고 부릅니다. Shall we walk with me in Le Mar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