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광장 뷰, 빅토르 위고의 방에서
파리의 오후가 완성되는 곳
보주광장 뷰, 빅토르 위고의 방에서
파리는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중에서도 마레(Le Marais)는 제가 파리에 갈 때마다 가장 천천히, 가장 오래 머무르게 되는 동네입니다.
친구가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만의 파리를 만들고 싶다면, 첫 장에는 마레를 적어.
걷는 일만으로도 여행의 감각이 깊어지는 동네니까.”
그리고 그 마레의 중심에는, 제가 사랑하는 장소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보주광장(Place des Vosges)입니다.
보주광장
파리의 오후가 머무는 자리
보주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계획 광장입니다. 1612년, 앙리 4세가 왕실 결혼식을 기념해 조성한 곳으로, ‘완벽한 대칭’과 ‘정제된 질서미’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붉은 벽돌 아케이드의 연속, 정사각형으로 완벽하게 잡힌 구조, 17세기 귀족 저택들이 만들어내는 기품 있는 풍경.
이 건축적 균형이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 이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파리의 소음이 한 톤 내려가고, 여행의 피로감이 사라져 제 마음도 느긋해져요. 보주광장은 화려한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파리의 오후가 완성되는 핫 플레이스라고 말하고 싶어요
빅토르 위고의 집 - 문장이 태어난 방
이 아름다운 광장의 모서리, 보주광장 6번지에는 프랑스 문학의 심장 하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로 빅토르 위고 Victor Hugo가 16년을 살며 <레 미제라블>의 대부분을 써 내려간 집이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버로 알게 됩니다.
이 곳은 누군가의 지성 뿐 아니라, 작가의 심장을 남겨둔 장소라구요.
서재에는 위고가 실제로 사용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붉은 실내 장식은 그의 성격처럼 강렬하면서도 품위 있습니다. 위고가 투쟁하던 문장들의 기세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창밖으로 보이는 보주광장의 정숙한 풍경은 그가 왜 이곳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했는지 말없이 설명해주는 듯합니다.
프랑스인들에게 위고는 ‘작가’가 아니라 ‘양심’
프랑스 사람들은 빅토르 위고를 국가적 문학가, 정치적 지성, 도덕적 목소리로 기억합니다.
레 미제라블 — 절망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인간들
위고의 작품은 비참함을 말하지만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으로 그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소설 속 장발장은 죄인이 아니라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였고,코제트는 연약함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코제트였고,언젠가 누군가의 장발장이 되어야 한다.’ 프랑스인들은 말합니다. 문학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문장이죠. 위고는 폭정에 침묵하지 않았고, 망명지에서도 ‘자유와 정의’를 글로 외쳤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문장력이 아니라 태도에 있습니다.
위고의 방에서 나와 다시 광장으로
위고의 방을 나와 다시 보주광장으로 발을 옮기면
방금 전까지의 웅장한 사유가 부드러운 오후의 공기 속에서 천천히 풀립니다.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잔디에서 공을 차고, 연인들은 벤치에서 오래 이야기하고, 노인들은 책을 읽으며 햇살을 만집니다. 수 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광장은 여전히 일상을 사랑하는 법을 그대로 가르쳐 주고 있죠.
보주광장은 수백 년 동안 이 풍경을 지켜봐 왔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광장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또한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을요.
바람을 듣는 일, 책장을 넘기는 일, 그냥 앉아서 광장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현재의 나를 잠시 바라보는 일.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여행중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이 행운들.
보주광장은 그래서 더 상징적이랍니다. 여기서 위고는 인간을 바라보았고, 지금의 우리는 위고가 보았던 View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인간들이 조용이 겹쳐지는 순간이 만들어 집니다. 문학은 때로 삶에서 태어나고, 좋은 여행은 늘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듭니다.
마레지구가 여행자에게 건네는 말
마레는 힙한 갤러리와 감각적인 숍이 넘치는 동네이면서도,
그 아래에는 귀족 사회의 전통과 프랑스 혁명의 잔향이 동시에 깃든 특별한 지역입니다.
보주광장과 빅토르 위고의 집은 그 두 층위—과거와 현재, 권력과 예술, 질서와 자유—가 하나의 풍경으로 섞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파리에서 단 하나의 오후만 보낼 수 있다면
저는 이곳을 선택합니다. 이곳에서는 잠시나마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다정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