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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진강 Oct 18. 2024

여왕의 종업원 프롤로그

시간,꽃,사랑

프롤로그





많은 것을 놓쳤다. 시간, 꽃, 사랑. 이 모든 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 고독하지 않은 세계에 있었다. 달이 넘어간 회백색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내게 후회할 거라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응. 후회 중이야. 섣부른 판단이 실수를 부르고 후회를 일으켰다. 나는 높은 구두를 신은 걸음을 서둘렀다. 몇일 전 가게 뒤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얼굴이 익숙했다. 다름아닌 내 가게의 종업원이었다. 다른 가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들을 '종업원'이라 불렀다. 종업원 여자는 미성년자였다. 학교는 다니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작았으며 눈망울이 선해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임신을 해 아이를 지우느라 가게에 출근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냥 지나칠려는 내게 여자 종업원의 물음이 날아왔다. "우선은 너부터 치료해야." 내가 그녀의 눈물 범벅인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말해둘게." 나는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었다. "이 바람은 아이를 낳은 거나 다름 없는 네게 독이야." 그녀의 손과 목덜미가 한겨울 살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시려웠다. "생리 주기가 변할테고." 여자의 울음이 거세졌다. 나는 상관않고 덧붙혔다. "모든 상황을 불신하게 될거야. 널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니?" 내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어서 네 병을 치료해." 몸 안에 남은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안개처럼 희미해질 것이었다. 나는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가 아프다는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 나는 그녀의 육체와 정신적 면역력이 상당히 결핍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증상이 있는 가게 종업원들을 여럿 봐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뻔한 위로나 당장 내일 먹고 살 돈이 아니었다. "의사를 찾아가. 우울증 약을 처방받고 좋은 상담사도 만나.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도 하고 남들처럼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봐." 그게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같은 아픔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새생명을 가지고 지운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드레스 앞자락을 걷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날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 이층 복도 모퉁이를 돌아 가장 안쪽방 문고리를 돌렸다. 철컹- 철컹-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내가 몸을 비키자 뒤따라 오던 남자 중 한 명이 나서서 무릎과 발로 문고리를 부쉈다. 나는 낡은 쇠마찰음 나는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내 시선은 천장의 한 점에 있었다. 뒤따르던 남자들이 날 지나쳐 공중에 떠 있는 여자 종업원에게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막상 현실로 닥치자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무게가 내 명치를 짓누를 뿐이었다. 나는 밧줄 매듭을 풀고 발가벗은 여자 종업원의 식은 몸을 바닥으로 내리는 남자들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밀랍처럼 굳은 여자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벌려진 입술이 적보랏빛으로 질려있었다. 눈은 내려감고 팔다리는 축 쳐져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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