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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별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늘 가까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영면의 길을 선택한 종업원을 여럿 봐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법을 무시했고 뒷탈이 날까 지인을 협박했다. 난 그런 제이의 방식이 일상적이었다. "낳을 거예요." 라고 말한 종업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미성년임에도 가게에서 일을 하고 남자친구를 먹여 살리는 그녀의 인생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걸 뼈 속 깊히 알고 후회했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줬더라면, 이곳에 있는 한 아이를 낳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르쳐 줬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나는 경찰 대신 온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그들은 이 세계에 필요한 무리였다. 남자 여자 할것 없이 힘이 좋고 덩치가 큰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진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그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단 한명의 명령만 충직하게 따랐다. 그 한명이 바로 '제이'였다. 나는 그의 무규칙한 처리 방식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매끄럽게 해결했다. 그에게는 그럴 능력과 재력이 있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따르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충직하지 않았다.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복중 따위 없었다. 우리의 관계, 그건 위험한 줄타기같은 거였다. 언제 누가 줄을 잘라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 신뢰는 있었다. 십년 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 사이에 거짓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고 해서 실체를 안 순간 그를 배신할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실체'라는 게 없었으니까. 굳이 찾자면 이 세계, 나의 존재가 그의 실체였다. 나의 존재란 '카트리나'. 최상급 창녀였다.
"그 애는 매일 아침 기차역에서 신문을 팔았어. 신문은 한 부 천원. 무더운 여름도 유난히 매서웠던 겨울도 그 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차역 플랫폼의 간이 편의점으로 출근했어. 가게에서도 늦은 새벽까지 일을 했지. 그 애의 남자친구가 사기, 도박, 폭력으로 유명한 건 하루 이틀 된 얘기도 아냐. 예전에 한 조직원이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그 애의 집에 간 적이 있데. 마치 시공중인 건물 같았다더라. 벽지는 다 뜯겨 있고 바닥은 장판도 없는 시멘트 덩어리······.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친구는 보이지 않고 여자 종업원 혼자 침대로 쓰는 장판 더미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더래."
아무렇지 않을 것 같던 내 감정이 먹먹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창가 종업원의 삶. 헐 벗다 보면 임신도 별일은 아니었다. 본래라면 여자의 축복이 되어야 할 소식. 그러나 매춘부에게 그런 것은 사치였다. 우리에게 임신은 평생의 치명적인 낙인, 수치가 되어 돌아왔다.나는 말을 하다말고 충격과 공포에 고개를 떨구었다.
"리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제이와 나 둘뿐인 침실이었다. 그는 벽 한면을 차지한 책장 앞에 있는 동그란 탁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었다. 그가 피운 담배의 독한 연기가 허공을 가로질러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다지 슬퍼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많은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죽은 종업원에 관해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지금 내가 진정하라고 해도 네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하겠지."
제이가 말했다. 재떨이에 재가 떨어지며 탄내음을 풍겼다. 나는 힘겨웠다. 오전 내내 가게 종업원들 사이에 떠도는 헛소문들을 잠재우느라 진을 뺐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무기력한 나로써는 그 제스쳐가 최선이었다.
"그 애 가족을 찾았어."
나는 제이의 말에 조금 놀랐다. 가족··· 있었구나. 죽은 종업원의 실명은 물론 대충 미성년자라는 것만 짐작했을 뿐 실제 나이도 몰랐다. 나는 멍하니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보험을 하고 있더라."
양가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는 평범한 가정. 그 애는 열 여섯살때 집을 나와 한 남자만 바라보며 살았다. 그 남자가 두 살 많은 사기, 폭력, 도박 전과가 있는 남자친구였다. 그들은 여러 곳을 배회했다고 했다. 모텔 달방에 살기도 했고 옥탑방에서 월세를 못내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아서 파출소로 도망친 적도 있어."
나는 제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꺼풀이 안타까움에 내려감겨 있었다. 열 여섯살 때는 바를, 열 일곱 살때는 남자친구와 같이 중국집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그 당시도 남자는 바람과 폭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그렇게 열 여덟 살때는 노래방을, 이후 각종 유흥업소를 전전하다가 사창가로······. 그 애는 왜 가족의 품을 떠나 인간말종인 남자친구에게 맞고 산 걸까?
"모르겠어. 특이한 건 딱 하나. 그 애는 아주 평범했다는 거야."
흡연과 음주, 비행과 폭력에서 멀리 떨어진 아이. 열 여섯살 때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선도부장으로 선발될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평범하게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 생일날이면 온 가족이 케이크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명졀이면 친척네 집에서 사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나는 딸의 죽음에 누군가를 책망할 그들 가족이 눈앞에 선해 착찹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사색에 잠겨 절망할 것이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슬픔.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다.
"리나, 절대 네 탓이 아냐."
제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책에 비관을 더하는 날 걱정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멈추면 안돼."
이 와중에 그는 엄격했다. 그는 이 웅장한 저택의 모양을 한 매춘굴. 화려한 불빛이 수놓인 밤거리의 주인이었다. 나라고 해서 이 동네에 애뜻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카트리나로써 그와 같이 굳건해야 했고 공평해야 했다.
"남자친구 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예상한대로 남자친구라는 인간은 난동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일한 가게 전부에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머리가 하애졌다. 제이가 날 안았다. 제이의 방식은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나는 그를 믿고 있었다.
"절대 그 새끼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어."
나는 그의 어깨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우리는 눈부신 유채꽃밭을 걷고 있었다. 멀리에서 보리수 나무가 느린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드문드문 아이들도 뛰어다녔다. 황금빛 태양이 발치를 비추었다. 우리는 노오란 너울 속에 있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아득히 정신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봄바람이 만들어낸 드넓은 군락 한복판에서 서로의 체온과 호흡, 향수를 맡았다. 손끝에 만져지는 꽃잎은 부드러웠다. 약하고 민감했다. 온 신경의 세포가 곤두선 우리는 자연의 광활함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샛노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우리를 그 속에 가두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의 열기는 소용돌이 속에 힘없이 갇혀 있느라 차가우면서도 내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폭풍은 금방 그칠 것이었다. 우리의 눈을 가린 노란빛 쾌락도 예민한 살점도 곧 절정에 달할 것이었다. 이윽고 대지가 신음했다. 볕은 지면과 하늘을 이었다.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꽃밭은 타오르는 노을과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거센 장애물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 특유의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해는 금방 저물어 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슬퍼런 달빛 켜켜히 유채꽃의 금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떨어질 수 없어."
내가 말했다.
"남에게 빼앗길 수도 없지."
나는 제이의 갈색 눈동자에 몽환적인 시선을 부딪혔다. 그가 신음했다. 우리는 서로 필요했다. 목숨을 위해서도 앞으로 있을 죽음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