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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의 성에 가치를 매겨 사고 파는 어둠의 시장. 장례식을 알리는 굵은 비 한 줄기가 정원 분수에 떨어졌다. 나는 어스름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가로 가 커튼을 젖히는 것이었다. 나는 양팔을 쭉 뻗어 두꺼운 녹색 커튼을 좌우로 걷었다. 회색빛 하늘이 우중충했다. 당장이라도 호우가 쏟아질 것같은 날씨였다. 나는 분수가 멈춘 저택 앞뜰을 내려다보았다. 빛을 잃은 관목이 심상치 않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 난 콘솔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아이러니했다. 나는 쎄한 기분으로 다시한번 창밖을 내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 건장한 체격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 분명 '검은 옷을 입은 자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것도 눈에 익은, 작년 제이의 부탁으로 정원 잔디를 기계로 밀어준 조직원이었다. 아직 앳된 조직원. 소년은 굳게 닫힌 저택 대문 근처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그 누구도 저택을 찾아오지 않았다. 하물며 저택을 지키는 경호원과 가사 일을 하는 하우스 메이드도 아직 자고 있을 터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려던 그때 반들한 창문 사이로 앳된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날 발견한 사실을 알았다. 그 시선은 매우 애처롭고 서글펐다. 나는 서둘러 창가를 피해 벽쪽으로 숨었다. 방금 막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비침이 있는 네이비색 나이트 가운 한장 차림이었다. 거기다 허리를 조여매는 끈이 거의 다 풀려 하얀 젖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나는 바보같이 손으로 입을 막고 다시 창가로 곁눈질 했다. 그러자 어두운 공기 속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소년이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서있는 게 보였다. 나는 녹색 커튼을 창문의 반만 당겨 가리고 옷장으로 달려갔다.
제이와 나,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번성한 음식점도 아기자기한 옷집도 없는 허름한 할렘가 그 자체였다. 우리는 이 허허벌판인 땅을 상점과 현금이 오가는 곳으로 하나둘씩 채워나갈 계획이었다. 제이가 짠 판의 스토리는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외로움을 호소하던 거리에는 다채로운 색을 띄는 쇼윈도가 즐비하게 되었다. 제이는 이곳으로 주류업체를 데려와 도매 공장을 세웠다. 그 외에도 그가 한 일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란 조직을 설립한 것이었다. 소명의식이 있는 누군가가 그렇게 이름 붙힌 게 아니었다. 조직의 이름은 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조직의 기원은 제이를 따르는 많은 수행원들을 동경한 할렘가 청년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빈민촌에서 태어나 귀족의 기사가 되는 것을 꿈꿨다. 제이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환대했다. 그는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의 거지 청년들의 꿈을 실현시켜 준 그들의 킹(King)이었다. 그들의 업무 내용은 단순했다. 그들은 환락가 내 암묵적으로 생긴 질서를 어기는 요소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종업원들의 지키는 데에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호의를 거절한 손님이 퇴근길의 종업원을 덮치려는 걸 막아 엄벌에 처한다든가, 인근 원룸촌에서 자살하려는 종업원을 구해낸다든가·····. 세상에, 한낱 빈민가 기생충으로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얻은 동네의 실세가 되다니! 나는 늘 그들을 의심했다. 그들의 검은 옷을 경계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제이처럼 떠받들고 섬겼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제이가 그들에게 그렇게 지시 내린 것일 수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저절로 몸집이 커졌다. 조직의 실세들은 양아치들의 무법 행위에 지친 주민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고 그 영웅은 또다른 영웅의 기질이 있는 소년들을 데려와 영입했다.
나는 계단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구두를 내딛었다. 현관문을 열자 이제 막 무르익는 장미의 어린 봉오리가 달큰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성노동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꽃향기였다. 나는 그 자그마한 화단을 지나 낮은 턱 앞에서 우산을 펼쳤다. 비옥한 흙이 벌써 촉촉해지고 있었다. 나는 분수 건너편의 검은 창살 대문을 향해 걸었다. 인기척을 듣고 돌아선 소년이 창살 사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며 푸르렀던 작년 여름을 기억했다. 장마가 그친 다음 날이었다. 잡초가 무성해지기 전에 다듬어야 한다며 이른 아침 제이가 창가에 서서 말했다. 그때는 보라색 실크 커튼이 따가운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관심 없단 듯 침대에 엎드려 뒹굴었고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한 소년이 달려왔고 그 소년은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열심히 잔디 깎는 기계로 잡초를 밀었다. 나는 출근 준비를 마친 제이를 따라 현관으로 내려갔다. 심상치 않은 볕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때 어디선가 매끄러운 음성이 들려왔고 우리는 서로 손그늘 아래에서 눈인사를 했다. 인상이 짙었다. 싱그러운 미소, 또렷한 이목구비. 건장한 체격. 그래서 기억할 수 있었다. 대문에 다가설수록 검정색 폴로셔츠를 입은 소년의 형상이 뚜렷해졌다. 아, 소년은 미남이었다. 꼭 탄산음료 광고에 나올 것 같은 모델처럼 생겼다. 나는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창살 대문 앞에 멈춰섰다. 턱을 들어 올려다보자.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고 있는 소년이 놀란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쉽사리 대문을 열어주진 않을 거였다. 펼친 우산을 든 반대 손에는 소년을 위한 접힌 우산이 있었지만 그 마저도 낼름 던져주지 않을 거였다.
"왜 혼자 여기에 있어요?"
내가 물었다. 조직은 늘 2인1조로 움직여야 했다. 그게 규칙이었다. 소년은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날 측은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혼자예요. 그럴 리가. 때는 한 여자가 죽은 직후였다. 심지어 그 여자는 미성년자였고 끔찍한 결단을 하기 직전 임신 중절 수술까지 받았다. 누군가 미쳐 위협적으로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나는 소년의 미성에 한번 더 놀랬다. 소년의 말투는 마치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은 세련된 청년 같았다. 나는 순간 제이가 떠올랐다. 소년은 끝내 이유를 밝히기 힘든지 입을 벌린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그는 이내 대답 대신 내 손에 있는 장대 우산 하나를 턱짓했다.
"그거 저한테 빌려줄 거 아녔나요?"
나는 망설였다.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소년에게 새 우산을 주고 돌아서야 했다.
"맞아."
창살 사이로 내가 우산을 내밀었다. 그의 젖은 손이 우산 손잡이를 받아들었다.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탁, 소리를 내며 건장한 남자 한명 통과할만큼 열렸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의 불청객도 큰 파도 뒤에 겪는 알 수 없는 심장의 고동도. 나는 내 손으로 저택 대문을 열었다. 안될 일이었다. 저택과 바깥 세상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순간 우리는 이상한 기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는 말없이 뒤돌아 소년을 앞장섰다. 뒤에서 우산을 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질척한 흙길을 따라, 멈춰버린 분수를 돌아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고개 숙이고 있는 장미 화단 앞에 섰다. 나는 우산을 접고 뒤따라 오는 소년과 눈을 맞췄다. 소년도 현관 아래로 들어와 짙은 남색 우산을 접었다. 나는 뺨에 묻은 물방울을 손날로 걷어냈다. 현관 문고리는 육중했다. 샹들리에가 꺼진 로비는 고요했다. 지금은 하우스 메이드도 종업원들도 모두 자고 있을 시각이었다. 나는 희박한 빛이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복도 창들을 지나 1층 골방으로 소년을 안내했다.
"쉿."
울창한 숲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깃털같은 바람처럼. 내 구두 소리는 높은 천장을 울리지 않았다. 내 손짓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섬세하고 절도있었다. 희미한 어둠 속, 두 인영이 불꺼진 방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소파를 정리했다. 이때도 역시 소리는 내지 않았다. 두꺼운 커튼도 내렸다. 나는 숨죽인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 역시 내 긴장감을 느꼈는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우리는 그렇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말없이 타오르는 벽난로 불길만 쳐다보았다.
"겁도 없이 찾아왔네요."
여기가 어디라고. 만약 누군가 우릴 본다면, 경호원이나 하우스 메이드에게 들킨다면 그 리스크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만큼 쌓인 분노와 억울함이 크다는 소리겠지.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 애와 잤나요?"
죽은 종업원. 몇일 전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달아 스스로 숨을 끊은 어리석은 년. 당신이 그 애를 임신 시켰나요?라 물을 려던 걸 순화시켜 말한 거였다. 소년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소년다운 들끓음. 뾰족하게 벼른 창살 같은 시선.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동료였어요."
"이 동네에서는 듣기 힘든 말이네."
불쌍해라 서글퍼라·····. 화장터에서 목놓아 우는 죽은 종업원 부모의 넋두리 나간 비명이 비를 뚫고 울려퍼졌다.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방관자인걸. 미성년임을 알고도 고용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걸 알면서도 외면한, 임신 중절 수술이 고통의 순환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은 방관자.
"우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어요."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을 통해 진정한 유대를 형성하고 무언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우린 하나였어요. 몸을 섞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었어요."
동료였던 종업원의 임신 소식을 들은 소년은 폭행, 사기, 도박 전과가 있는 남자친구를 찾아가 반 죽여놓을려 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이 환락가의 위반 행위 중 하나 '개입'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항상 종업원들 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하며 지시가 없을 경우는 함부러 움직여서도 안되었다. 만약 소년이 죽은 종업원을 위해 데이트 폭력을 막았다면 앞으로 조직원들은 모든 종업원들의 데이트 폭력을 제지해야 했다. 만약 소년이 죽은 종업원을 위해 중절 수술할 돈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모든 조직원이 임신한 종업원들을 위해 중절 수술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주황색 불길 앞에서 흐느끼는 소년의 등에 손을 올렸다.
"당신은 모르겠죠. 카트리나인 당신은·····"
우리는 키스했다. 길고 깊으며 애처로운 키스였다. 우리는 순식간에 반라가 되어있었다. 공기는 뜨겁고 숨은 차가웠다. 우리는 침침한 그림자 속에서 하나로 겹쳐졌다. 소년이 달뜬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내 콧잔등으로 어디에서 묻어났는지 모를 후덥지근한 땀방울이 떨어졌다.
"고작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날 찾아왔단 말이야?"
"고작이라니·····!"
소년의 몸짓이 거세졌다. 허벅지 사이가 질척했다. 벽난로의 온기 때문이었다. 창가를 덮은 엄충한 커튼 때문이었다.
"쉿, 조용히 해야지. 너도 알겠지만 이건 금기야."
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내 손은 소년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애도의 물결을 그리듯 움직였다. 나는 소년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골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윽."
여기에 있을 리 없는 빛이 눈앞에 스치며 제이의 형상이나타났다. 제이의 아래에는 내가 있었다. 우리는 격하게 섹스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잠잠하던 정원이 사악한 기류로 가득 찼고 어딘가에 은색 벼락이 내려쳤다. 근사한 녹음이 갈길 잃은 미친년처럼 역동적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신음했다. 금단의 시간에 억눌린 굵고 투박한 교성이었다. 허벅지 아래로 뜨거운 액이 흘러내렸다. 벽 한켠에서 튀어오르는 벽난로 불씨가 소년의 땀에 젖은 상체를 비추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옷을 찾아 손을 뻗었다. 예상치도 못한 자극에 경직된 근육을 달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대충 다듬고 방을 빠져나갔다. 대체품이 된 기분은 아주 더러웠다. 하지만 동료를 잃은 소년에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위로는 그것 뿐이었다.
"모르지 않아."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가난과 굶주림. 그건 '카트리나'가 되기 전 나의 태생과도 같은 향수였다. 지워지지 않는, 씻어도 씻겨내려가지 않는 지독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