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진강 Oct 21. 2024

여왕의 종업원 4

Catrina[카트리나]


4




내 최초의 기억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어둠이었다. 나는 홀로 끝없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름과 나이, 생김새를 잊어갔다. 나의 검은 눈동자와 새카만 머리카락, 가느다란 입술과 넓은 이마······. 나날히 혹독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오로지 살기 위해 그것들을 견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세찼다. 한여름 밤의 더위가 무구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늦가을의 세숫물 또한 차가운 폭력이었다. 그 시절 가장 찬란했던 것은 새벽 박명이었다. 마치 한줄기의 희망 같아서, 이 선천적인 가난을 벗어날 기회를 줄 것만 같아서. 가난은 아주 작은 형체에서부터 시작되는 특별한 물질이었다. 가난은 유연하고 트랜드를 만들어 나가는 패션(Fashion)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믿는 종교는 없었다. 나는 주변 환경과 마음의 변화, 성장과 생각에 집착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나는 열 입곱 살이 되었고 가난도 커져만 갔다. 소리없이, 빠르게······. 나는 한 갈빛 동네를 무감각하게 밟았다. 마을 입구에 낡은 담배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를 지키고 있는 건 백발의 노파였다. 그 노파는 날 향해 말을 걸었다.

"얘!"

산듬성이 넘어로 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악천후에 비가 쏟아져 온 사방이 새카맸다. 노파는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 뒤 기억은 단편적이었다. 나는 노파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거기에는 손녀인 메리도 있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예쁘고 깡마른 여자였다. 우리는 요리를 하고 함께 식사를 했다. 내가 빨래를 널면 노파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메리는 노파와 교대로 담배 가게 일을 도왔다. 나는 그들의 평온한 일상 속에 묻어가는 듯했다. 내가 달이 넘어간 회백색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낙후된 동네 특유의 낡은 치안과 그에 대비되는 화려한 향수가 날 가난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언제까지 노파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가난에 목이 마른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잘 곳이 없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이 불안은 거대한 동기부여와 의욕이 되어 내 판단력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후회할거야. 고독할테고."

메리는 돌아서는 내 팔목을 잡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노파는 쇠약해져 잔병이 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모든 걸 잊게 되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조종 당하는 불쌍한 노예처럼. 난 메리의 가녀린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화류의 중심을 향해 달려나갔다. 만약 내게 가족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노파와 메리였다. 안녕 나의 은인, 영웅들······!

 피빛 석양이 날 비루하게 비췄다. 시간과 사건은 빠르게 흘렀다. 난 어느 한 식당으로 굴러들어가게 되었다. 난 그곳에서 제이를 만났다. 제이는 누구나 알 법한 명문 사립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식당에 출입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동갑이었다. 나는 뉴스, 경제, 스포츠, 여행을 몰랐지만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원했다. 갈망했다. 각자 다른 것을 서로에게서 찾고 싶어하듯. 때로는 정복욕으로 가득 찬 거친 감정을 드러내며 때로는 목적 없는 관계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나는 한국 이름이 없어. 제이(Jay)는 영어 이름이야. 부모님이 한국 이름을 따로 지어주지 않았어."

돈을 내고 날 안은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나도 이게 본명이야."

"카트리나가?"

침대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제이가 물었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서 마주친 눈이 가벼운 호선을 그렸다. 우리는 단시간에 서로를 잡아당겼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나누었다. 당시 식당에서는 제이가 나라의 심장이 되는 기업 오너 가문의 자식이 아니냐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에게서는 범인이 가질 수 없는 기질적인 여유와 압도감이 있었다는 거였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 보일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했고 그에 관한 모든 걸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머지않아 내 몸에는 새생명이 생겨났다. 제이와 나의, 우리의 아이였다. 난 포기하기 않겠다고 제이에게 말했다. 아기는 사랑스러울거고 많은 부분이 서로를 닮아있을 거였다. 난 물도 마시기 힘든 입덧과 사물이 두 겹으로 보이는 미열을 참아냈다. 살은 5kg 이상 빠졌고 먹은 것 없는 위장은 태아의 신호에 맞춰 위액을 짜내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제이의 뭉툭한 코끝과 커다란 눈망울, 이지적이고 단단한 성격을 떠올렸다.

"지워야 해."

밤마다 태어날 아기의 이목구비를 상상하고 있던 내게 제이가 말했다. 그는 나의 희생과 사랑을 알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나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앞으로 너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게. 아니, 아무한테도 네 아이라고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날 좀 내버려둬!"

그는 내 흐리멍텅한 눈을 외면했다. 그에게 외친 것은 전부 진심이었다. 난 정말 아이를 낳으면 쥐죽은 듯 조용히 살 생각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아이가 재벌의 사생아라 털어놓지 않고, 신고의 진통은 탄생의 영광이라 여기며 태어나 처음 진짜 가족을 품에 안고 기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이의 손아귀 힘은 완강했다. 그는 입덧으로 앙상해진 날 동정하긴 커녕 무슨 세균 덩어리를 안고 있는 병자 취급을 하며 산부인과로 끌고 갔다.

"널 위해서야."

제이는 그 말은 우리를 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반들반들한 검은 차가 날 태우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제이의 손에 이끌려 수술대에 눕기 전까지 나는 실감나지 않았다. 마취 바늘이 내 손등을 찌를 때까지도!

이전 03화 여왕의 종업원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