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반골기질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누군가가 내게 “힘내!”라고 하면 되레 힘이 쭉~ 빠지고, “행복해야 돼”라고 말하면 불행한 이유만 백만 가지 떠오르는 것 말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반골기질이 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튀어나와 모두를 당황시킨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P. Lakoff)가 정의한 유명한 프레임 이론이 있다.
“눈을 감으십시오. 10초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시간 동안 당신은 절대 ‘코끼리’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 시작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1초도 지나기 전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코끼리를 떠올린다. 특히 ‘절대’ 나 ‘결코’와 같은 부정의 어조를 가진 수식어가 붙을수록 더욱 강력하게 코끼리에 대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뇌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뇌가 하는 활동의 98%는 의식 수준 아래에 있는 무의식에서 일어난다. 실험을 진행하는 초반에 ‘코끼리’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우리의 무의식에는 알게 모르게 ‘프레임’이 걸려 버린다. 그리고 모든 사고는 그 프레임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진다.
둘도 없는 나의 친구 안토니는 나와 대화를 마칠 즈음에 항상 “사라 행복해야 해!”라고 클리셰처럼 말해준다. 정말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마음이 짠해지는 걸 감출 수 없다. 그 마음은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마음인지, 안토니에 대한 연민의 정인지, 인류가 당면한 작금의 현실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난 알 길이 없다. 하나, 마음이 편치 않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이에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쾌락의 역설> 또는 <헤도니즘의 역설 (Paradox of Hedonism)>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행복은 그것을 인식할수록, 그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손에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도망가버리고, 쫓으려고 애쓰던 파랑새처럼 저 멀리 날아가버린다.
행복은 살아가다가 축복처럼 다가오는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아니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그저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낼 때 뜻밖에 주어지는 횡재 같은 것이 바로 행복인 것이다.
누군가를 힘들게 만들고 싶을 때, “힘내!”라고 말해보자.
누군가에게 불행한 상태임을 주지 시키고 싶을 때, “너 행복하니?”라고 물어보자.
그건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매우 크게 작용하는 기제로써, 우리가 살아갈 때 ‘행복’에 대해 너무 크게 인식하지 말아야 하는 가르침을 준다. 인식은 강박을 낳고 강박은 집착을 도출해 결국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될 일은 된다>의 저자 마이클 싱어(Michael A. Singer)가 그랬다.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면,
되어야 할 일은
반드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주요 골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되 그 결과까지 집착적으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행복도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을 때 어느 순간 홀연히 찾아와 우리 곁에 머물 수호천사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는 프레임에 걸려들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