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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4. 2021

2. 국가 없는 화폐

2016년 6월에 엘살바도르 중앙은행에 출장을 앞두고 나는 가져갈 책을 찾고 있었다. 세계은행은 직원들의 출장을 ‘미션(Mission)’이라고 부른다. 종교적인 것이나 무슨 스파이의 업무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출장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내게는) 사명감을 상기시켜 주었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세계은행 본관 건물에 들어서면 입구 왼편에 각국의 국기가 걸려있고 그 옆으로 대리석 벽에 '우리의 꿈은 빈곤 없는 세상 (OUR DREAM IS A WORLD FREE OF POVERTY)'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그 글귀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었다. 내가 일하던 세계은행 재무부서는 전형적인 재무기능 외에도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 주로 개발도상국가의 중앙은행과 재무부와 협력하는 다자개발은행으로서의 독특한 기능을 갖고 있다. 나는 이중 주로 중앙은행들의 자산 관리를 위한 개발 및 교육에 중점을 둔 일을 했다.


여름 추천도서 목록에서 <블록체인 레볼루션: 비트코인 이면의 기술이 어떻게 돈, 비즈니스,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가?>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쓴 책으로, 아버지 돈 탭스콧(Don Tapscott)과 그의 아들 알렉스 탭스콧이 썼는데 그래서 더 마음에 끌려는 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 엘리자베스 워런과 그녀의 딸이 함께 쓴 <맞벌이의 함정 (The Two-Income Trap)>을 읽고 부모와 자녀가 같은 주제를 고민하고 책을 함께 쓴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감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블록체인이 뭔가 싶어 검색하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블록체인의 약속: 신뢰 기계 (The promise of the blockchain: The trust machine)'를 읽게 되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기사에는 '비트코인의 배후 기술은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비트코인?! 활이 화살을 당기듯 비트코인이라는 말이 내 호기심을 당겼다. 나도 그때까진 비트코인을 단순히 온라인 다크넷에서 사용되는 범죄자의 화폐로 간과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기본적으로, 공유되고 신뢰할 수 있는, 모든 사용자가 검사할 수 있는 공개 장부로, 어떤 한 사용자도 통제할 수 없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장부는 이중 지출을 막고 거래를 지속적으로 추적한다. 중앙은행 없는 화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비트코인 광신도들은 어떤 중앙은행도 통제하지 못하는 순수한 디지털 화폐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에 매료되어 있다. 진정한 혁신은 디지털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를 주조하는 신뢰 기계이며 그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 이코노미스트지 기사의 일부

"중앙은행 없는 화폐"라는 말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국가가 없는 통화? 나는 한때 한 나라의 화폐와 지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1991년 초 유럽을 두 달 동안 배낭여행을 했었는데, 그때  각국의 지폐에 매료되었다. 그리스 지폐 100 드라크마 위에 피라에우스 아테나, 프랑스 지폐 20 프랑 속 클로드 드뷔시, 50 프랑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와 '어린 왕자', 100 프랑의 폴 세잔, 200 프랑의 구스타브 에펠과 에펠탑, 500 프랑의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스페인, 이탈리아 등등.

2001년 12월 말에, 유럽의 열두 나라의 동전과 지폐가 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화로 대체되기 며칠 전, 나는 사라질 지폐를 기억하기 위해 사두고 싶은 마음에 세계은행 지하에 있는 직원 공제 조합으로 내려갔다.

"이거 정말 사실 거예요?" 창구 직원이 물었다. "며칠 후면 이것들은 새로운 통화인 유로화(EUR)로 대체되고 쓸 수 없어요."

당시 세계은행 회계부서에서 일하던 나는 2001년 하반기 몇 달 동안 회계 시스템의 모든 통화가 아무런 문제 없이 단일 통화인 유로로 전환되도록 하기 위한 ‘유로화 전환 업무’를 수행해왔다. ‘나도 다 알고 있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창구직원에게 답했다. "저는 단지 기념품으로 그것들을 모으고 싶어서요." 그 이후로, 나는 여행지에서 그 독특한 지폐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폐를 몇 장씩 혹은 최소한 사진으로라도 찍어 남겨왔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와서야 나는 그들의 화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92년 이후 공식 통화였던 살바도르 콜론(SVC)은 2001년에 경제를 안정시키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미국 달러로 대체됐다. 국내 통화와 병행하여 또는 국내 통화 대신에 외국 통화를 사용하는 것을 ‘통화 대체’ 또는 더 일반적으로 ‘달러화’라고 한다. 그러나 주권을 포기하는 완전한 통화 대체는 드문 경우다. 중남미의 에콰도르와 엘살바도르,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와 같이 심각한 경제 위기 이후에 그들의 화폐가 완전히 신용을 잃고 무가치해진 몇몇 국가에서만 발생했다. 어느 해인가 남편이 딸의 생일에 장난 삼아 짐바브웨 10억 달러 지폐를 3달러에 사서 "여기 10억 달러!"라며 딸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던 기억이 났다.

산살바도르 출장으로 며칠 머무는 동안, 일을 하고 돌아온 후엔 안전 문제로 외출하지 못하고 호텔 방에 틀어박혀 블록체인에 대해 계속 찾아보고 읽었다. 2015년 엘살바도르에서 발생한 살인율은 주민 10만 명당 100명이 넘었다. 몇 해 전 온두라스로 출장 갔을 때, 출장에 앞서 이 지역의 치안이 위험하니 호텔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도착하자마자 주의를 요구하는 또 다른 이메일을 받았는데, 온두라스 옆 나라 엘살바도르에서 세계은행 직원이 출장 중 총에 맞아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유엔이 2013년 발표한 세계 범죄와 살인율에 따르면 온두라스는 인구 10만 명당 90.4명으로 세계 최고였다. 2015년 엘살바도르 비율이 100을 넘어서면서 지난 몇 년간 이 지역의 상황은 악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블록체인과 신뢰를 잇는 또 다른 제목 "블록체인의 빅 이노베이션은 돈이 아닌 신뢰다"(코인데스크, 2016년 5월 21일)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를, 무엇을 믿을 것인가 - 신뢰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다. 아담은 태초에 에덴동산에 있는 과실수 가운데 하나만 빼고는 어떤 과일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금지된 과실을 만지면 죽을 것이라는 예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그에게 왔을 때, 신에 대한 그의 신뢰는 흔들렸다. "당신은 확실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정보로 아담과 이브의 신뢰가 신에서 뱀에게로 옮겨지면서 이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이생고 뼈 (자료 출처: https://afrolegends.com/2013/08/29/the-ishango-bone-craddle-of-mathematics/)

이러한 신뢰의 문제는 인간관계와 사회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 삶의 필수적인 요소인 거래를 위한 기반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대 문명은 거래에 대한 신탁 시스템으로 돈과 회계 기록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콩고 민주공화국의 나일강 진원지 근처에서 발견된, 2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생고 뼈( Ishango Bone)는 개코원숭이의 허벅지 뼈로 그 위에 새겨진 표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계산 기록으로 거래를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에는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경우 그 권리를 넘겨주는 자가 상대방에게 신 한 짝을 벗어 주어 그 일에 대한 증거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룻 4:7)

성경 룻기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거래 기록 관습을 이렇게 나타내었다. 이러한 신탁 시스템은 수메르 설형문자, 잉칸 키푸, 또는 점토 토큰과 같은 더 나은 것으로 수천 년에 걸쳐 발전했고, 결국 세계 여러 지역의 복식부기 회계와 지폐로 발전했다. 복식부기 시스템은 한 거래를 두 계정으로 나누어 항상 자금흐름과 재화나 용역의 흐름을 구분하여 기록해 복식기장(Double-entry bookkeeping)이라 불린다. 고대의 제도와 비교했을 때, 화폐를 사용한 복식부기 장부는 돈의 흐름과 재화나 용역의 흐름을 각각 확인할 수 있어 단식부기에 비해 분명 혁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돈의 흐름을 다루는 은행가나 거래를 확증하는 외부감사들이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에서 이 체제가 완벽할 순 없다. 예를 들어, 판매자가 구매자를 속여 1천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1만 달러에 구입하게 하고, 은행가는 거래 금액의 10%의 수수료를 받고, 판매자는 감사인에게 수수료를 지불하는 경우, 은행가나 감사인은 더 높은 수수료를 받는 한 이 거래에 대해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이다. 

현금, 신용, 그리고 다른 금융 거래를 다루는 은행들, 특히 큰 은행들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항상 부패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특히 20세기 이후 미국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달러 독점을 통해 은행가들과 함께 세계를 지배해 왔으며, 이러한 부패는 전 세계의 신뢰와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은행들이 무모하게 팽창해왔고 그러다 그 거품이 터지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그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난 두 번의 국제금융위기를 몸소 겪으며 이를 생생하게 목도한 바 있다.


그 첫 번째는 한국에서 CPA로 일하던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였다. 내가 1994년에 공인회계사로 일을 시작했을 때, 한국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의무교육기간인 2년을 삼일회계법인 국제조세 부서에서 마치고 1996년 6월부터 컨설팅회사로 옮긴 뒤 사업을 확장하는 국내 기업에 자본 분석과 자문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한국의 모든 부문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1997년 여름에 전 직원에게 엄청난 수익을 나누어 특별 휴가비를 지급하기도 했다. 

1997년 하반기 태국 바트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에서 시작된 갑작스러운 통화 평가절하가 순식간에 한국으로 번졌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한국 기업들은 무너지고 있었고 내 고객들은 파산하지 않기 위해 사업 확장 자문에서 자산매각 서비스를 문의해왔다.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1997년 말까지 한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외채 압박에 파산상태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IMF가 1980년대 중남미를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한국에 요구했고, 이는 수많은 해고를 초래했다. 당시 실업수당과 같은 사회 안전망이 전혀 없는 한국에서,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과도한 불안과 동요를 가져왔다.

당시 한국인은 그 시기를 마치 IMF에 의해 고난이 야기된 것처럼 '일본 식민지 시대'와 비슷한 'IMF 시대'라고 부르며 IMF를 병의 원인을 오진하고 증상을 악화시키는 돌팔이 의사로 여겼다. ‘70년대 치솟는 국제오일 가격에 오일 개발을 믿고 중남미에 돈을 마구 빌려주었던 서구 금융과 국내 사회기반 및 복지 증가를 위해  그 돈을 쓰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80년대 초 오일 가격의 급락으로 초래된 상황과 ‘90년대 말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한국 경제는 수출 위주여서 대외 수요와 통화 리스크에 훨씬 취약했는데, 세계 수요 둔화와 일본 경제의 위태로운 상황에 더해 아시아 통화 붕괴로 인한 대규모 자본유출로 촉발되었다. 

한국인들은 1998년 초에 일제강점기를 앞두고 벌였던 외채 갚기 운동을 상기하며 IMF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한제국이 당시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1천3백만 원의 빚을 지자 한국 남성은 담배를 끊고 여성은 결혼 보석을 팔아 그 빚을 갚았다 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와 비슷하게 IMF 시대에 ‘금 모으기 운동'으로 기부한 금액은 총 미화 22억 달러인 반면 IMF 구제금융 금액은 미화 580억 달러에 달했다. 

나는 2001년 5월에 세계은행 회계부서에서 업무를 시작한 후, 외환위기 당시 세계은행이 제공한 한국에 대한 긴급 차관 내역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 긴급대출은 보통 금리에 4%의 추가 이자율을 더한 것이었다. 총 구제금융 금액 580억 달러에 추가 이자율을 환산하면 연간 미화 23억 달러, 한국인이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총금액보다도 더 많은 돈을 매년 추가 이자로 내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3년 만에 이 위기를 반전시키고 긴급 대출액을 모두 갚아 당시 IMF와 세계은행을 모두 놀라게 했다. 

한국의 IMF시대는 확실히 한국을 변화시켰다. 1999년 내가 미국으로 건너간 후, 한국은 IMF시대부터 중산층이 무너져  부자와 중, 저소득층 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고 부자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이 악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IMF 시대에 실직한 사람들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이들 중 일부는 자살하거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IMF의 구제금융을 거부하고 고정환율을 유지하며 고집스럽게 말레이시아를 지켜낸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는 외환거래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며 금융위기를 아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서구의 음모라고 규정했다. 


두 번째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맞았다. 2008년 9월 15일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날, 나는 연수를 받기 위해 뉴욕 맨해튼에 있었다. 월요일 아침, 호텔 방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먼저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로 호텔 건너편 건물 앞에 전광판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시선이 옮겨졌다. 전광판에는 파란 바탕에 빨간 글씨로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신청을 했다"라는 문구가 번쩍이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길에 서서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우주선에서 내뿜는 광선을 바라보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TV를 켰다. 영국 BBC 뉴스는 런던 리먼 브라더스의 직원들이 사무실 짐을 챙겨 상자를 들고 떠난다는 소식과 영국 은행과 유럽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수십억 파운드와 유로를 금융 시스템에 쏟아부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날 아침 연수받으러 가는 길에 리먼 브라더스 사옥을 지나며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중이었던 직원들이 폐쇄된 건물 주위에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뒤, 당시 세계은행 재무부에서 일하던 나는 미국 금융시장에서 화산 폭발 터지듯 터져 나온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08년 9월 리먼의 부도는 세계 시장에서 핵폭탄과 같았다. 미국 정부와 연준은 금융기관을 구제하기 위해 2조 달러를 쏟아부었다. 세계은행과 IMF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빠르게 확산된 위기에 대응하여 국가들에 대한 대출을 대폭 늘렸다.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IMF는 대출 국들이 빚을 갚은 뒤 수입이 크게 줄면서 금융위기 없는 몇 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IMF는 직원 수를 줄이고, 예산을 줄이기 위해 연금과 복리후생 제도를 개편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소득 증대를 위한 보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허덕이던 IMF는 2008년 미국이 주도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순식간에 호황을 맞아 다시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됐다.

그레이함 서머스 (Graham Summers)는 그의 책 <모든 것은 거품이다: 중앙은행 정책의 최종 과제 (The Everything Bubble:Endgame For Central Bank Policy)>에서, 연준 창설 이후 미국 달러는 구매력의 96%를 상실했고 1913년 연준을 창설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은행 왕조의 대표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노미 프린스 (Nomi Prins)는 <모든 대통령의  은행가 (All the Presidents' Bankers: The Hidden Alliances That Drive American Power)>에서 월스트리트(‘월가')로 불리는 미 금융가와 세계은행의 긴밀한 관계 - 월가가 세계은행이 공급할 자금을 민간 시장에서 조정하며, 세계은행 설립 이래 월가와 미국 정부 간의 공동 운영으로 유지되며, 어떤 국가가 지원받아야 하며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미국 정부와 제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흔히 자본의 흐름은 인체의 피와 같고, 금융시장은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과 같다고 비유한다. 금융가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 피를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그러다 그 심장이 멎을 지경에 이르면 위기 때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찍어 새로운 피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기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러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금융시스템이 전 세계 서민들의 피를 모두 빨아먹는 흡혈귀가 된듯하다. 


이런 현 금융체제를 생각할 때 ‘중앙은행이 없는 화폐’는 터무니없지 않은 듯 보였다. 특히, 자국 화폐를 버리고 미달러화를 택한 바나나 공화국, 엘살바도르에 앉아 있는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해 보였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용어는 미국 작가 오헨리가 처음 만들었다. 1904년 오헨리는 미국 기업들의 경제적 착취 아래 있는 온두라스를 묘사하면서 지배층의 독점적 이익을 위해 국가가 민간 기업처럼 운영되는 국가 자본주의의 경제를 가진 나라를 의미하게 됐다.

미국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있었다. 폴 크루그먼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뉴욕타임스에 "백악관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젯밤 내 친구 말대로 우리는 핵무기를 가진 바나나 공화국이 되었다."라고 했다. 그의 뒤를 이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미국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바나나주의의 주요 원칙은 도둑 정치 (kleptocracy)로, 권력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재임 기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그리스인들은 플라톤과 알렉산더 대왕 이전에 기원전 5세기부터 사용되었던 그들의 화폐 이름인 드라크마를 버렸고, 다른 유럽인들도 유로화를 위해 그들의 화폐를 버렸다. 인터넷 시대, 글로벌 디지털 경제시대에 새로운 화폐, 국가와 중앙은행이 독점할 수 없는 디지털 화폐는 그 시대를 맞이한 듯하다. 지난 20여 년간 두 번의 국제 금융 위기를 목도한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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