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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4. 2021

3. 디지털 화폐는 부정부패를 줄일 수 있을까?

"잠시 의자 밑을 봐도 될까요?" 

비행기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내게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물었다. 2016년 8월, 나는 트리니다드 & 토바고의 스페인 항구 공항에서 막 이륙한 비행기에서 다리를 쭉 뻗은 채 작은 창을 통해 별이 빛나는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에 있는 손님이 뭔가를 떨어뜨려서요, 제가 손님 의자 밑을 찾아봐도 될까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쳐다보고 있는 내게 그 스튜어디스는 다시 말을 건넸다. 내 앞 좌석을 보니, 그 작은 비행기의 비즈니스 객실 전체를 한 대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비즈니스석 맨 뒷줄에 앉아 있었는데, 내 앞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젊은 아가씨가 한두어 살 된 아이와 함께 있고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그 앞 좌석과 반대편 좌석 두 줄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서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가족인 듯싶었다. 나는 아기가 장난감이나 간식을 떨어뜨렸으리라 생각했다. 

"아, 제가 제 좌석 밑을 확인해 드릴 수 있어요.” 내가 다리를 내리고 의자 아래를 내려다보려 하자, 스튜어디스가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나는 그녀가 내 좌석 아래를 확인하도록 일어서 옆으로 비켜주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와서 다시 내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좌석 아래를 한 번 더 확인해도 될까요?"

이번에는 좀 짜증이 나고 궁금하기도 해 물었다. "뭘 찾으세요? 뭘 떨어뜨린 거죠?"

"앞 좌석 손님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어요. 다시 한번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녀와 이 가족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반지? 보석? 난 그녀가 수색하도록 다시 일어섰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비행기 마이크를 꺼내서 알렸다. 

"비즈니스석의 한 손님이 미국 달러 지폐 뭉치를 분실했습니다. 돌돌 말린 뭉치가 비행기가 이륙하는 동안 그의 휴대 가방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굴러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좌석 아래를 확인하시고 찾으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례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주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루마리 화장지 휴지처럼 말린 미화 지폐 뭉치라고?! 나는 내가 방금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현금을 그렇게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앞 좌석에 어깨가 떡 벌어진 이 남자가 밀수업자나 조직폭력배 두목인가? 내 의심은 한 여름 담쟁이덩굴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예전에 한국에서는 담배 모양으로 현금을 말아 담뱃갑에 넣어 뇌물로 건네주곤 했다고 들었었다. 중간 규모 뇌물에는 약 5천만 원을 처리할 수 있는 음료수 박스를, 더 큰 경우엔 사과 상자를 사용했다 한다. 60억 원을 실을 수 있는 15kg의 사과상자는 2015년 '가구가 줄어서 핵가족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핑계로 사용을 금지시켰다 한다. 2009년에 도입된 5만 원권 지폐는 작은 상자로 같은 액수의 뇌물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유럽 중앙은행(ECB)은 2016년 5월에 사기 및 돈세탁을 억제하기 위해 범죄자들이 활용하는 500유로 지폐의 조폐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리적 현금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탈세와 불법 외환거래 등 범죄행위에 좋은 도구가 되어왔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범죄 행위는 특정된 범죄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니는 친구, 동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교회에서 몇몇 가족과 함께 캠핑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남자들은 낚시를 하러 나가고 아이들은 노는 동안 엄마들은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꽤 수다스럽고 쾌활한 한 친구가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전에 누가 돈을 보관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말해줘서 나는 지폐를 냉동고에 보관하곤 했거든. 한 번은 내가 은행에 돈을 가져갔을 때, 은행원이 내가 건네준 현금을 받고는 코에 대고 킁킁거리는 거야.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 식재료 냄새가 지폐에 스며들었나 보다고 추측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지. 근데,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세게 두드리는 거야. 문을 열다가 기절할 뻔했잖아. 기관총을 든 FBI 요원들이 내게 총을 겨누며 '당신의 돈세탁에 대한 보고가 있어 나왔습니다' 하는 거야. 그리고 내 집구석 구석을 다 뒤지고는 발견한 현금을 모두 압수해 갔어. 

이제 10년이 넘었으니 웃기는 얘기로 나눌 수 있는데 그때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앓아누웠다니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식당을 몇 개 운영했다. 그녀는 탈세를 위한 자신의 행위가 옳지 않은 일이자 불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무지의 산물이었을까? 그녀의 그 이야기 이후, 나는 "오직 현금만 받습니다"라는 간판이 붙은 식당이나 가게엔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일상에 스며든 부패한 방식들의 만연함을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범죄 에피소드가 있다.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금융 전문가이자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독실한 기독교임을 자처하는 한 동료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내 아버지가 한국에서 원화를 대리인에게 주고 대리인이 여기서 내게 미달러를 주는 3자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는 외환 브로커나 대리인을 아세요? 집을 사려고 한국에서 돈을 가져오려 해서요." 그녀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것이 불법 환치기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재무분석가 자격증까지 있는 이가? 남편과 함께 자녀 하나를 선교사로 키우고 싶다고 말하던 이가 어떻게 불법 외환거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아했다.

바퀴벌레가 그 배설물이나 껍질 등이 부서져 미세한 입자로 공기 중에 떠다니며 호흡기 질환, 피부염, 알레르기 등등의 해를 일으키 듯, 만연한 부도덕과 고위층의 부패가 많은 이들의 의식에 질환을 일으켜 마비시킨 듯하다. 2016년 4월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의 내부고발자 문건 유출로 그동안 비밀리에 부쳐졌던 부자와 공직자에 대한 금융정보가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국가 원수와 그 관계자, 장관, 선출직 공무원, 기업인 등 50여 개국의 총 140명의 명단이 노출되었다. 그들은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역외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탈세와 불법으로 부를 축적해 온 것이었다.

나는 1995년에 "외국인 자회사를 통한 한국 다국적 기업의 소득 이동"이라는 제목으로 탈세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썼다. 바퀴벌레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었는지, 삼일회계법인 국제조세부서에서 일하며 대학원을 다니는 중에 논문을 쓰느라 쉽게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주제를 찾았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탈세에 관한 검증을 해보고자 했었다. 당시 이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나는 이미 부정부패가 많은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를 갉아먹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인식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부패한 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2016년 이 스캔들이 공개되기 훨씬 전에, 오바마와 그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파나마-미국 무역 촉진 협정 (Panama–United States Trade Promotion Agreement)을 밀어붙였다. 2009년에 체결된 이 협정은 부유한 미국인과 기업들이 역외 법인과 은행 계좌를 설립하고 세금을 회피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4년 OECD가 개발한 정보공유기준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미국은 외국으로부터 자국민이 해외에서 발생한 자산과 소득에 대한 세금과 자산 정보를 제공받지만,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를 다른 나라에 공유하지 않아 미국을 세계 최대의 조세피난처로 만들었다.

파나마 페이퍼스의 스캔들을 다룬 영화 <빨래방 (The Laundromat)>에서 해외 금융 서비스를 제공했던 파나마 법률회사의 파트너인 위르겐 모삭(Jürgen Mossack)과 라몬 폰세카(Ramón Fonseca)는 수감 3개월 만에 풀려나며 "우리는 서비스를 계속하기 위해 델라웨어로 갑니다."라고 말한다. 델라웨어는 미국의 대표적인 조세회피 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취임하며 기업의 탈세와 부패가 국가 안보를 위협할 지경이며 국제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을 위해 애쓸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36년간 상원의원으로 대표한 곳이 델라웨어다. 영국 조세 정의 네트워크 (Tax Justice Network)가 최근 발간한 금융비밀지수 (Financial Secrecy Index)에 따르면 미국이 조세피난처 순위에서 세계 2위로 올라섰다. 미국이 탈세, 절도, 돈세탁을 세계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에는 트리니다드 & 토바고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의 국회의원인 켄 에미리스(Ken Emrith) 의원이 포함됐다. 파나마에 있는 그의 페이퍼 컴퍼니는 트리니다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브라질 건설 회사로부터 6백만 달러를 받았다. 트리니다드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린 뭉칫돈을 잃어버린 이는 어쩌면 내가 의심했던 밀수업자나 갱 두목이 아니라 파나마 페이퍼 스캔들 명단에 오른 그 국회의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나는 모두가 추적 가능하고 투명한 블록체인을 활용한 디지털 화폐가 도입되면 만연한 부패를 개선할 것인가, 이를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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