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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4. 2021

4. 금융권 밖의 사람들 (The Unbanked)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입품에 의존합니다. 생필품의 90% 이상이 수입되고 있고, 모두 미국 달러로 지급 결제되지요. 최근에는 디-리스킹(de-risking) 조치로 기존의 금융기관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있어요. 우리 트리니다드 & 토바고 사람들은 금융서비스 영역 밖으로 내몰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우리의 일상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2016년 8월, 롭(Rob)과 내가 트리니다드 & 토바고 중앙은행(CBTT)으로 출장 갔을 때였다. 중앙은행의 IT부서 이사가 출장 마지막 날에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세계은행 재무부서에서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고객을 담당하는 매니저인 롭은 트리니다드 항에 있는 인도 레스토랑으로 향하면서  IT부서 이사의 남편인 '제이'가 정부 부처 장관일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부부가 함께 올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오래된 운치가 있는 식당에서 만나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네모난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제이는 섬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트리니다드 & 토바고는 카리브해 최남단에 위치한 섬나라로 오일과 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해 구매력 평가(purchasing power parity: PPP)를 기준으로 한 1인당 국내 총생산량 (gross domestic product: GDP)이 북미 아메리카를 통틀어 미국, 캐나다에 이어 3위인 곳이다. 세계은행의 국가별 통계 분류에 따르면 고소득 국가에 속한다. 빠른 비트의 경쾌한 칼립소 음악과  스틸 드럼, 카니발 축제의 종주국이기도 한 곳이다. 인도계와 아프리카계가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IT부서 이사와 남편 제이는 인도계였다.

제이가 섬나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를 떠올렸다.  '아무도 섬이 아니다/전체가 아니다/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본토의 한 부분이다.’라고 한 존 던(John Donne)의 시를 생각하며 고립된 섬에서의 삶은 얼마나 피폐할 것인가 생각했다. 예부터 섬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다나 대륙으로 나갔다. 동떨어져 고립된 섬에서의 삶은 더 큰 바다와 대륙에 의지해야만 할 터였다. 그러므로, 다리처럼 물리적이든, 금융 또는 통신 네트워크처럼 디지털화된 것이든  연결은 섬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은행들은 강화된 위험관리 준수 조치(De-risking measures)에 따라 각 은행과의 관계를 검토해 왔고 많은 은행들은 위험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그 관계를 종료하거나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돈세탁, 금융테러 등 불법 흐름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이 조치들은 글로벌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고위험을 핑계로 수익성이 낮은 지역과의 관계를 끊는 구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금융서비스의 제한은 국제 송금을 더 어렵게 하고 국제 무역 및 투자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화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며, 국가 전체의 금융서비스를 해체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외지에서 일하는 가족의 송금과 수입되는 생필품에 의존해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열변을 토하는 제이의 절박한 모습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도 내내 마음에 남았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대체 금융 시스템이 구축되면, 현재의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많은 섬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품은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은행의 동료 중 누군가를 설득해 동반자로 만들어야 했다. 먼저, 함께 출장을 갔던 롭을 떠올렸다. 롭은 카리브해 섬나라뿐 아니라 금융산업이 취약한 많은 중남미 국가를 고객으로 관리하는 자리에 있으니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일 듯했다.


롭은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컬럼비아 사람이다. 영국 코미디언 미스터 빈처럼 뺨에 검은 반점이 있고 얼굴 표정도 미스터 빈과 비슷해 함께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나게 하는데,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시절부터 지녔다는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 남미 특유의 사람처럼 말도 많고 박식한 그는 내게 함께 출장을 다닐 때마다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몇 년 전 롭과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책에서 체 게바라의 흑백 사진이 내 발 옆으로 떨어졌다. 난 그 사진을 집어 들면서 그에게 물었다. "누구 사진인가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꼭 미스터 빈을 닮은, 그 특유의 과장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체 게바라! 모든 중남미인들이 존경하는 영웅이자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아, 그렇군요. 제가 어렸을 땐,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은 남북 휴전 상황 때문에 금지되어 있었어요. 전 어렸을 때,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괴물이라고 배웠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마르크스주의 책을 읽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내 지식은 마르크스와 엥겔을 넘어선 적이 없었지요."하고 그에게 답했다.

그 이후로 나는 <체 게바라와의 짧은 만남>과 같은 '체 게바라'라는 이름을 포함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롭이 "무엇보다도, 세계 어느 곳, 누구에게나 저질러진 어떤 불의도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체 게바라를 소중히 여긴다면, 블록체인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나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016년 9월, 그가 한 중앙은행의 요청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내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나는 블록체인에 대해 대화를 시도했다. 

"롭, 지난달에 트리니다드에 출장 가서, 인도 식당에서 식사할 때 제이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지요? 당신이 금융 서비스를 제한하는 것이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했죠. 블록체인과 AI 같은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은 대체적인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중앙은행과 금융 감독당국이 이러한 혁신자들과 협력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블록체인? 비트코인 말하는 거야? 너 미쳤어? 비트코인은 사기야! 그게 어떻게 돈이야? 오직 한 국가의 중앙은행만이 돈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절대 안 돼!"라고 외치듯 손을 가로저으며 뒷걸음질 치며 멀어져 갔다. 그가 콜롬비아 중앙은행에서 평생 일하고 은퇴한 후 세계은행에 들어온, 골수까지 뿌리 박힌 중앙 은행원이라는 사실을 나는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블록체인이 비트코인과 같지 않다는 것, 분산 원장 기술(DLT)이라는 기초기술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이것이 어떻게 금융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설명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부록 1: 금융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총 성인 인구 비율 참조)


글로벌 금융시스템으로부터 한 사회를 더욱 고립시키는 금융 접근 차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거나 투자할 수도 없고, 긴급한 상황이나 사업 혹은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 자금을 빌릴 수도 없다. 이러한 시스템이 없다면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시스템을 개발하게 되는데, 규제되지 않은 금융거래는 종종 금융 사기를 초래한다. 사기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단계를 나눌 때 불륜이나 살인보다 더 큰 죄로 보았는데, 금융 사기는 단지 돈을 잃는 차원이 아니라 그에 연루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삶을 파괴하고 그 일생동안 남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무시무시한 악행이다. 나는 그 예를 한국에서 자라며 보았었다.

내가 한국에서 자라던 시절엔, 서민들이 다가갈 수 있는 적절한 금융 시스템이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계’라는 전통적인 민간협동조합을 활용했는데, 계를 인솔하는 지도자가 매월 일정 금액을 저축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수령자의 순서를 결정해 목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면 수령하는 이자가 높아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계원이 모여 저축 및 대출과 같은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따라야 할 금융 규제도 없고 사실상 법적 약관이나 계약도 없는  비공개 모임이다. 

그런지라, 계 인솔자나 이른 순번으로 일찍 수금한 이가 달아나는 경우도 많았다. 내 오빠의 한 친구는 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가 계를 조직해 운영했는데, 한 계원이 첫 번으로 돈을 받고는 도망가면서 그 엄마도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 그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또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의 계가 무너지면서 부모님의 이혼을 겪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놀이터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나는 모두 학교에 전학 온 학생으로 바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난 큰 집에서 살았었어. 근데, 어느 날 사람들이 집에 마구 들어와서 내 피아노와 모든 가구들에 빨간딱지를 붙이고는 가져가고 엄마는 어디론가 떠나고..."

당시 열 살이었던 그 친구에게 비극적인 순간이었고, 그녀는 삼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이 트라우마를 잊지 못한다. 


모두가 휴대전화를 쓰는 이 시대에, 개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이 디지털 방식으로(electronic Know Your Customer: eKYC) 이루어지고, 돈이 디지털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외딴섬에 있는 사람들도 은행 지점 없이 송금을 하거나 저축 혹은 대출과 같은 금융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기존 은행이 설치되지 않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들에서 이 기술이 빠르게 채택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필리핀의 경우, 해외 필리핀인들이 본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2015년 285억 달러에 달했다. 2016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약 6만 명의 이주 필리핀인들이 매년 2억 3천1백만 달러 이상을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다. 2016년 한국 내 최대 메시징 앱인 카카오톡으로 유명한 카카오가 2014년 초 출범한 필리핀 비트코인 스타트업 사토시 시타델 인더스트리(SCI)의 지분 40%를 현 금융권 제도에서 소외된 이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파이낸셜 인클루젼 (Financial inclusion)‘ 사명을 걸고 매입했다.

전 세계 국가 간 외환거래는 2015년 자료로 총 미화 150조 달러가 넘는다. 현재 해외 결제는 SWIFT 메시지 프로토콜을 사용하여 거래를 실행하는 은행 네트워크인 상호 연결된 은행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각 은행이 이 가치사슬에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수수료가 동반되는데, 총수수료는 많은 경우 결제 금액의 10%를 초과하는 데다 시일도 오래 걸린다. "오늘날 세계가 웹에서 '정보'를 움직이듯이 우리는 세계가 '가치'를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암호화폐 (Cryptocurrency) XRP로 금융기관 간 송금을 효율화한 리플 (Ripple)이 해외송금 흐름을 비교한 도표이다.

현재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금융시스템을 통한 해외 송금은  미국에 사는 한 구매자(Buyer)가 일본의 공급자(Seller)에게 구매한 경우 구매자가 자신의 거래 은행에 가 송금을 요구하면 이는 미 중앙은행과 그 거래은행을 거쳐 일본의 중앙은행의 거래은행과 일본의 중앙은행, 그리고 공급자의 거래은행을 거쳐 판매한 공급자에게 돈이 지급된다. 하지만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암호화폐를 활용할 경우 구매자의 거래은행에서 바로 공급자의 거래은행으로 연결되어 실시간에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송금이 이루어진다. 암호화폐를 이용한 송금을 제공하는 비트페사(BitPesa) 등의 다른 디지털 결제 플랫폼과 달리, 리플의 경우 기존의 은행을 대상으로 서비스 제공을 시작하여 해외송금 비교에 기존의 거래은행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비트페사, 카리브해에서 시작한 비트(Bitt), 남미에서 확산되고 있는 스트라이프(Stripe) 등등의 디지털 결제 플랫폼은 기존의 금융인프라가 전혀 없는 곳에서도 앱을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만 있으면 누구나 실시간에 송금을 할 수 있고 기존의 수수료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섬에서 뭍에 나가 일하는 가족의 송금이 기다리는 섬사람들, 혹은 트리니다드에서 제이가 토로했듯 무역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섬사람들, 금융권 밖에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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