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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4. 2021

6. 새로운 시작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년 2월이었다. 나는 '누가 2월에 이런 말을 하지?' 하고 돌아보았다. 보통 12월 연말부터 시작되는 연말 휴가시즌은 늦어도 1월 셋째 주에는 휴가가 끝난 뒤 다시 출근해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는 대개 ‘차이니즈 새해'로 불리는 음력설이  1월 마지막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1월 말에 다시 이런 인사를 나누었다. 음력설에 맞춰 중국에 휴가를 갔다가 막 돌아온 피터였다.

"안녕, 피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중국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항상 머릿 털이 밤송이처럼 삐죽삐죽했던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군입대를 앞둔 사람처럼 짧아졌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처럼 고국에 가면 헤어스타일리스트들이 훨씬 더 좋고 저렴하기 때문에 항상 고국을 방문한 후에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돌아온다. IT부서에서 재무부서를 지원하는 일을 하는 피터는 평소에도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지리적 친밀함 때문인지 가깝게 지냈는데 그날은 그가 더욱 반가웠다. 지난 12월 도미니카 공화국에 출장 갔을 때, DLT를 활용한 새로운 생태계 구축을 추진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꿈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온 후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 후 나는 그와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나는 지난 12월 도미니카 공화국 중앙은행에서 몇 년 전에 PAT2를 도입할 때 함께 일했던 아마리우스에게서 회계사로 일해온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찬사를 들었다. 출장 마지막 날인 금요일 저녁에 다른 부서 직원들은 일을 모두 마치고 스낵을 먹으며 떠들고 있을 때, 그와 나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회계는 업무 성격상 트레이더가 거래를 하고 나면 SWIFT 부서에서 확인을 하고 회계부서에 자료가 넘어온 후에야 일이 진행되므로 항상 마지막까지 일을 하게 된다. 금요일 저녁 식사도 못하고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안쓰러워 나는 “저녁 식사도 못하고 이렇게 계속 일을 해야 해서 미안하다"라고 했더니 그가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PAT2 전에는 모두 수작업으로 일을 해야 해서 월말 결산 때면 새벽까지 일을 하다 집에 가서 한두 시간 겨우 자고 다시 출근해 일하곤 했어요. PAT2로 회계업무가 자동화된 후에는 적게 일하고도 훨씬 효율적으로, 더 나은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데다 교육과 연수를 받을 시간까지 있는걸요. 제가 이 중앙은행에서 일한 지가 25년이 넘어, 은행에서 지원해줘서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되려 야간에 법대에도 다니고 있는 걸요. 은퇴 후에는 힘든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이게 다 PAT2 덕분이에요. PAT2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꼭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 다시 이곳에 오시면 더 가까이 함께 일하고 싶어서 그동안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한 걸요. 지난번엔 제가 영어를 못했던 거 기억하세요?”

그랬다. 지난번엔 회계부서의 이사 외엔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없어 이사가 내가 한 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해 일을 진행했었다. 아마리우스의 말은 블록체인에 대한 꺼져가던 나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폈다. 예산 부족으로 모두 몸을 사리는 재무부서에서 블록체인이라는 이 낯선 개념을 가지고 혼자 열정을 키우는 일이 부질없어 보여 포기하려던 때였다. 주어진 업무 만으로도 바쁜데 짬이 날 때마다 밤낮으로 블록체인 관련 기사와 페이퍼를 읽어 가며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관련 뉴스와 아이디어를 챙기는데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때에 디지털 기술이 얼마나 개인의 삶과 중앙은행의 업무를 개선했는지 전해 준 아마리우스의 말은 내게 블록체인으로 개선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래서, 출장에서 다녀오자마자 피터에게 전화해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마침 연말이 다가오니 연말 인사도 할 겸, 그는 IT부서에서 일하니 재무부서에서 추진할 수 없다면 그가 IT부서에서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무실 근처 타이 음식집에서 만나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에 대한 얘기를 나눈 후, 그도 좀 알아보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의 연말 휴가와 그의 음력설을 낀 휴가를 마치고 나서 다시 만나 얘기하자고 했었다.


피터는 휴가에서 돌아와서인지 새해를 맞이해서인지 더 활기차 보였다. "네, 아이들이 중국에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큰아이가 초등학생이라 학교를 빠져야 해서 이번 여행을 좀 망설였었는데, 저학년일 때 중국 최대 명절을 경험하도록 데리고 나간 건 정말 잘한 결정인 거 같아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점심 약속을 잡았다. 내가  2월 중순에 트리니다드 & 토바고 중앙은행에 출장이 잡혀있는 데다 중앙은행 고객들을 위한 상반기 회계 워크숍이 있어서 3월에나 만날 수 있었다.

 3월 초인데도 사무실에서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양지바른 곳에 있는 벚꽃나무들은 어느새 분홍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밝은 햇빛과 따뜻한 바람이 부는 좋은 날이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웨이트리스가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피터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는데, 야외 테이블을 아직 개장하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빨리 주문을 하고 점심시간이 얼마 없어서 바로 블록체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점심 약속이 없으면 보통 일을 하며 책상에서 점심을 먹었다. 방과 후 아이를 학교에서 픽업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제시간에 일을 마쳐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IMF)에서 일하는 아내와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함께 출퇴근하는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중국에서 비트코인 채굴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중국에서는 비트코인 채굴에 광풍이 인 것 같더라고요." 피터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그를 향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분산원장 기술이 재무부서 일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터는 IT 전문가이면서 시스템 측면에서 재무 부서 업무를 잘 알고 있으니 더 많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을 듯해서... DLT와 관련된 뉴스를 추적해 오고 있는데, 피터가 원하면 보내줄 테니 좀 더 살펴보고 다음엔 몇 가지 아이디어를 파악한 후에 서로 이 기술의 적용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미 여러 중앙은행들이 블록체인을 실험 연구해보려 랩(Lab)을 만들어 시범적으로 개념 증명 사례(Proof of Concept)를 시작했고,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은 금융 인프라를 블록체인으로 재편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어요.” 


우리의 짧은 점심식사 이후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피터는 활짝 웃으며 내 사무실에 들렀다. 

"모닝커피 마실 시간 있어요?"

"그럼." 나는 그와 함께 내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무실 카페로 걸어갔다. 나는 늘 아침 일곱 시쯤에 사무실에 도착해서 헤이즐렛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기에 이미 모닝커피를 마신 후였다. 녹차 한 잔을 들고 나는 하얀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피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이디어를 개발하셨는지 먼저 들려주세요. 그러면 내 생각을 나눌게요."

"좋아요. 재무부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우선 현금 거래에 대해 생각했어요. 재무부 현금관리팀이 다양한 통화로 전 세계에 위치한 사무소나 은퇴연금 등 수많은 해외송금을 처리하는데 이 기술을 이용해 혁신적인 시도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실시간으로 결제가 되니 2-3일씩 기다리는 동안의 결제가 제대로 되지 않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송금 수수료 절감으로 비용 절감도 할 수 있고요.” 

나는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피터는 듣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연금은 개인에게 지급되기 때문에 지역 사무소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듯하고 한 지역의 사무소와 연계해 추진해 볼 수 있을 듯해요. 그 아이디어의 세부사항을 확정 짓고 나면, 현금관리팀장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건 없어요?" 피터는 신이 나서 물었다. 

"DLT는 일상적으로 취급하는 여러 가지 금융상품 거래에 적용될 수 있어요. 스마트 계약을 사용하는 DLT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모되는 수동 프로세스를 자동화할 수 있으니, 자동화되지 않은 복잡한 거래, 거래 당사자가 많은 거래일 수록 DLT는 더 많은 이점을 제공하지요. 문제는 아직 이 기술이 너무 초기 단계라 누가 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아직 많지 않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찾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더 많은 정보를 얻으면 다시 모이자고 말했다. 피터와 나는 둘 다 순전히 개인적인 열정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할당해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진척이 느렸다. 


그러던 중 나는 세계은행에서 또 다른 블록체인의 마니아, 로즈를 찾았다. 나는 세계은행 내에 블록체인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찾다가 우연히 인트라넷 사이트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젊은 경제학자로 2017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코인데스크의 3차 연례 블록체인 행사인 컨센서스 (Consensus)에 대해 글을 올렸다. 마치 무인도에서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그녀에게 바로 전화해 인사를 나눴다. 

"안녕, 로즈, 나는 은행의 재무부에서 일하는 사라라고 합니다. 방금 인트라넷에서 당신의 블록체인에 대한 글을 봤어요. 당신을 찾아서 너무 기쁘고 이 정보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록체인과 관련된 일을 하나요?"

"안녕, 사라. 그 정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블록체인과 관련된 공식적인 일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난 그냥 개인적으로 블록체인에 대해 매혹되어 혼자 광야에서 외치듯 소리치고 있어요. 허용된 IO (Internal Order) 코드에 따라 타임시트를 제출해야 하니, 내 상사가 내가 주어진 업무와 관련 없는 이 주제에 대해 당신과 대화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면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이 기관은 너무 관료적이고, 위험을 회피하느라 새로운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높은 음조의 목소리에 말이 빠른 그녀는 세계은행의 환경에 상당히 진저리가 난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녀가 아직 젊어서 이런 조직에 길들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은 전통적으로 한국 부모들이 결혼하는 딸에게 새로운 삶을 위해 가르쳐주던 것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여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정도는 다를 지라도, 어떤 새로운 출발이든 인내심을 필요로 하고 어떤 성장점이든 고통을 가져온다. 니체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국에서 직장을 시작했을 때, 한 선배가  "직장 생활할 때 3년 주기로 찾아오는 권태기를 현명하게 극복해야 사회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라고 내게 말했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한 직장에 오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한국에서 나는 3년은커녕 2년도 안되어 한 곳에서 배울 것을 다 배운 듯해 권태로웠고, 2년의 연수과정을 마치자마자 다른 직장으로 옮겨갔고 그 후 2년 반을 근무한 후 미국으로 떠나왔다. 하지만 세계은행에서는 2001년 회계부서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 예산, 자본, 대출, 신탁자금, 투자, 채권 발행 등 다양한 사업부와 교대로 근무해, 매년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워야만 했다. 회계 부서에서 7년을 근무하고는 나는 세계은행이라는 코끼리의 꼬리를 만지고 있는 장님처럼 느껴졌다. 2008년 재무부로 옮겨온 후 또 다른 8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20여 개 국가를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었고 여전히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참 안됐군요. 로즈 당신이 무슨 말하는지 나도 알아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은 때로는 작은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도 너무 느리고 너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죠. 때때로 나는 삶의 미덕인 인내와 끈기를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인트라넷 사이트에 올린 그 행사에는 갈 거예요?" 나는 그녀의 탄식 섞인 불만에 마음이 아파 그녀를 달래며 말을 건넸다. 인내, 지속성, 그리고 긍정 - 성공의 세 원칙 또는 인생의 다섯 가지 P – 인내, 지속성, 끈기, 열정, 그리고 목적 (Patience, Persistence, Perseverance, Passion, and Purpose)을 기억하며 그녀에게 말하긴 했지만, 때때로 나 자신도 비겁함과 인내심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 작업 중입니다. 행사 주최 측에 연락해서 세계은행 직원 특별 할인을 학계에 적용하는 같은 방식으로 받기로 협상을 했는데도, 제 상사는 업무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어요. 하지만, 행사 때 한 패널 세션의 패널리스트가 되어 진행자의 후원을 받아 가려고 합니다." 

그녀의 고전 분투하는 모습이, 그녀의 결의가 전화상의 목소리에 실려 내게 전달되었다.

"당신이 해낼 수 있기를 바래요. 당신의 노력에 감탄합니다. 세계은행 직원 특별 할인을 협상했다고 했는데, 그 할인 코드를 공유해 줄 수 있나요? 나도 이 행사에 참석하고 싶어요. 비용이 적게 들면 아무래도 상사의 승인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요! 상사와 행운을 빕니다. 당신 상사가 내 상사보단 덜 완고하기  바래요." 


할인 코드 덕분에, 행사 참석자들을 위한 특별 요금으로 2박의 호텔 숙박비와 교통비를 포함한 총비용은 1천 달러 미만으로 추산되었다. 곧바로 교육 요청서를 작성한 후, 나는 내 상사 빌에게 갔다. 할인 코드가 곧 만료되기 때문에 망설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빌은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이의 없이 내가 내민 요청서에 서명했다. 뉴욕에서의 3일간의 훈련 비용 치고는 저렴해서였는지, 다른 일에 너무 몰두해서였는지, 아니면 블록체인에 대한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블록체인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며 가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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