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윤정 Oct 24. 2021

13. 컨소시엄 (Consortium)

컨소시엄은 둘 이상의 개인 또는 단체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자원을 투입해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을 뜻하는데, 라틴어로 동반자, 동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블록체인은 기본적으로 분산형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에 둘 이상의 참여가 필요하고 더 큰 네트워크에 여러 기능을 하는 이들이 모여 생태계를 이루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블록체인을 처음 구현한 비트코인의 경우는 퍼블릭 Public 블록체인으로 누구나 별도의 허가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반면, 컨소시엄은 뜻을 같이하는 여럿이 모여 승인 절차를 거친 후에야 참여할 수 있다. 많은 기업들이 블록체인 기술의 유용성을 인식한 후 컨소시엄을 만들어 협력해 오고 있다.

특히 많은 규제를 받고 국제적으로 일을 하는 금융업계의 경우 일찌감치 2014년에 R3 컨소시엄을 형성했고, 이후 IBM이 이끄는 하이퍼레저 (Hyperledger)와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기업에 활용하고자 하는  EEA Enterprise Ethereum Alliance 등 많은 컨소시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R3와 함께 프로젝트 자스퍼(Jasper)로 추진한 블록체인 기반 결제시스템을 테스트한 후 2017 년 9월에 보고서를 발표했고, 세계 곳곳에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2017년 하반기부터 세계은행 재무부서에 적용할 만한 블록체인 사례를 구체화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컨소시엄과 그들의 협력사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중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MAS(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가 주도하는 프로젝트 우빈(Ubin)이 단연 돋보였다. MAS는 2016년에 이미 기술 협력자로 R3를 선정해 여덟 시중은행과 싱가포르 거래소와 협력해 블록체인을 활용한 금융기관 간 결제를 시험해 2017년 봄에 그 결과를 발표한 후, 프로젝트 2단계로 기술 협력자로 R3 외에도 하이퍼레저 패브릭(Fabric), 컨센시스(ConsenSys)  쿼롬 (Quorum), 마이크로소프트의 아주르 (Azure) 블록체인 플랫폼을 더하고 시중은행도 열 곳으로 늘려 시중은행 간 지급결제 및 유동성 관리를 테스트한 후 2017년 11월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나는 MAS의 보고서를 보고 흥분된 마음으로 내 보스 빌과 피터, 블록체인 랩 동료들에게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이메일을 보낸 뒤 빌과 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빌, 여러 중앙은행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시도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저희 고객 중 한두 군데를 싱가포르나 캐나다처럼 선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중앙은행과 연계해 저희도 함께 그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싱가포르와 캐나다 중앙은행 모두 지금까지는 국내 지급결제 테스트만 시도했는데 다음 단계로는 다른 국가의 금융기관과 협력해 해외 지급결제를 시도할 것이라 발표했어요.”

나는 아시아 지역의 우리 고객 중 한국은행과 아프리카 지역의 남아공 중앙은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빌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빌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싱가포르나 캐나다 중앙은행이 우리의 연계로 특정 국가의 중앙은행과 협력을 할지도 변수지만, 그렇다 손 치더라도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지?” 

막연한 가능성에 들떠 뚜렷하게 구체적인 안을 세우지 않은 채 빌과 얘기를 시작한 나는 잠시 멈칫했다. 

“저희가 저희 고객 중앙은행의 외화자산 관리를 하고 있으니, 싱가포르나 캐나다 국채에 그들의 자산을 투자하고 지급결제를 하는 거래 같은 건 가능하지 않나요?” 나는 빌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투자부서와 상의를 먼저 해 보아야 할 걸.. 자산관리 가이드라인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자산과 지역 등이 한정돼 있으니..” 

머뭇거리는 빌에게 나는 적극적으로 말했다. “제가 투자부서 국장님과 상의해 보고 경과보고 해 드릴게요.” 


세계은행 재무부서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부서, 유동자산과 투자자산을 관리하는 투자 부서, 직원의 연금을 투자 관리하는 연금자산 부서, 이 모든 거래의 운영을 담당하는 운영부서, 포트폴리오 평가 및 위험 분석을 하는 계량분석 부서, 중앙은행과 재무부 등의 외부고객을 담당하는 재무자문 부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중 투자부서의 책임자는 한국은행과 한국투자공사를 거쳐 온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전에 한국은행에 재직할 당시 3년간 세계은행 재무부서의 재무자문 부서에 파견 나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와 함께 필리핀으로 출장을 갔었고 그 이후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내는 터였다.

“추 국장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2018년 1월, 나는 이른 아침 그를 찾아갔다. “아, 그럼요.” 그는 으레이하듯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나는 그의 사무실 안 동그란 탁자에 놓인 의자에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난 후 나는 블록체인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지난해부터 블록체인과 핀테크에 열심인 건 아시죠? 브라이언이 관할하는 채권 발행이나 해외송금은 재무부에서 추진할 수 있어서 작년부터 함께 일해서 진행해오고 있는데, 정작 제가 속한 투자운영부서 관련해서는 시장에서 그런 생태계가 형성되어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이 나와야만 투자를 할 수 있으니 생태계 형성에 애를 쓰고 있어요. 생태계 구축을 위해 저희 투자 운영부서가 할 수 있는 일을 두 가지 방향으로 잡고 있는데 둘 다 추 국장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나는 애절한 모습으로 탁자에 몸을 당겨 앉으며 말했다. 

“뭔데요? 윤정 씨 하는 일이면 내 힘닿는 데까지 돕지요.” 추 국장님 또한 두 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첫째는 싱가포르와 캐나다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블록체인  테스트를 해 오고 있는데 저희 투자부서에서 그들의 국채를 투자해 블록체인 기반의 지급결제를 시도할 수 있을지 하고요, 두 번째는 저는 어떻게든 한국을 이러한 시도에 포함할 수 있었으면 해서 생각한 건데, 혹 한국은행에서 한국 국채를 블록체인 기반으로 발행하면 저희 투자부서에서 투자할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다면, 국제금융시장에서 블록체인 기반 생태계 구축에 추 국장님이 담당하시는 투자부서도 참여하고 저희 고객인 한국은행도 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추 국장님은 미소를 머금고 나의 말을 찬찬히 들은 후 입을 열었다.

“둘 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을 듯하네요. 먼저 첫 번째 안의 경우, 우리 투자 포트폴리오에 어떤 채권이 포함될지는 가이드라인 내에서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결정하니, 구체적인 이야기는 블록체인에 비교적 관심을 보이고 있는 포트폴리오 매니저 가네쉬를 만나 일단 얘기를 나눠보세요. 두 번째 한국은행 건은, 우선 한국 국채는 정부의 재무부에서 먼저 의사결정을 하고 한국은행이 발행업무 대행을 하니 재무부와 한국은행을 모두 설득해야 하는데 두 곳 모두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라 만만치 않을 듯한데… 게다가 한국 국채가 우리 재무부서의 투자가이드라인에 포함돼있긴 하나, 현재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이라 투자가 허용되지 않은 상태고…”

나는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럼, 남아공은 어떤가요? 남아공 국채는 허용이 되나요? 한국이 안 된다면 남아공 하고 추진해 볼 수 있을까요? 저희 고객 중앙은행 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한국과 남아공을 생각하는데, 남아공은 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에 굉장히 적극적이거든요. 남아공 중앙은행은 싱가포르 MAS와 유사하게 블록체인 프로젝트 코카(Khokha)를 최근에 시작했어요. ”

“남아공도 우리 재무부서의 투자가이드라인에 포함돼 있긴 한데, 최근 정세가 악화돼서 신용등급이 떨어져 투자가 허용되지 않은 상태예요. 어떻게든 힘이 돼 주고 싶은데 만만치가 않네요. 우선 한국은행에 가장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송금 관련 협력을 해 볼 수 있을지 확인해 보면 어떻겠어요? 이곳 워싱턴 D.C. 한국은행 지점에 나와 있는 본부장이 한국은행 지급결제 전문가데 한번 같이 만나볼래요?” 추 국장님은 친절하게 제안을 하셨다. 워싱턴 D.C. 한국은행 지점에서 매달 한 번씩 D.C. 경제인협회인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다음번 세미나에 함께 가서 얘기를 나누기로 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워싱턴 D.C. 한국은행 지점에서 하는 2018년 새해 첫 세미나에 추 국장님과 함께 참석해 세미나를 마친 후 본부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부장은 한국은행의 지급결제 관련 문서와 함께 본점에 연락할 만한 사람들을 연계해 주었다. 그렇게 계기가 되어 한국은행 본점의 지급결제팀과 연결이 되어 컨퍼런스콜을 추진하게 되었다. 2월 첫 컨퍼런스콜에 지급결제팀, 전자금융 연구팀장, 그리고 막 생겨났다는 블록체인 연구팀의 책임자가 한국은행 본점에서 참석하고 세계은행 쪽에선 재무부 내 재무자문 부서에 한국은행에서 파견 나와 있는 홍 박사와 나, 그리고 IT 부서에서 일하며 지난 몇 년간 세계은행과 IMF의 한인직원협회 회장으로 섬겨온 JY가 참석했다. 각자의 간단한 소개 후에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양 기관에 동시에 몸을 담고 있는 홍 박사가 회의 안건과 순서를 잡았다. “먼저, 한국은행에서 현황을 간략히 알려 주시고 난 후, 세계은행 쪽에서 이곳 상황을 브리핑한 후 향후 협력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하도록 하지요.” 한국은행의 전자금융 팀장이 말했다. “한국은행에선 블록체인과 디지털 화폐 연구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습니다. 현재 블록체인이 중앙은행의 지급결제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적용 가능성과 방향 등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올 상반기 내에 보고서를 출시할 예정입니다. 저희로서는 세계은행이 저희와 어떤 협력을 하기를 원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세계은행에서는 IT 부서에서 작년 6월 블록체인 연구소를 설립한 후 많은 분야에 블록체인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무부서에서 또한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도입해 좀 더 많은 이들이 금융의 혜택을 받고,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금융시장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재무부서 내부적으로 신기술을 도입해 적용하는 것뿐 아니라, 저희 재무부서는 전 세계 오십여 개국의 중앙은행의 외화자산관리 및 자문 역할을 하며 협력하고 있어 현재 많은 중앙은행들이 시도하고 있는 사례들을 연계해 국제금융시장에 블록체인을 활용한 새로운 생태계 형성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나는 ‘미국의 월가가 지배하는 국제금융시스템이 아닌 새로운 금융'을 공적인 회의에서 말할 순 없었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을 향해 일하고 있었다.

한국은행의 블록체인 팀장은 세계은행 블록체인 연구소의 구체적인 활동을 더 듣고 싶다고 해서 다음번 회의 때 화상회의로 준비해 JY가 발표하기로 하고, 홍 박사는 3월까지 세계은행과 한국은행 간의 협력안을 구체화해 4월에 열리는 세계은행과 IMF의 연례총회 때 공식적인 양해각서(Memorandum of Understanding: MOU)를 맺자고 제안했다. 나는 몇 주 뒤인 3월 초에 두 번째 회의 때 좀 더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논의하겠다고 약속하고 첫 회의를 마쳤다. 나의 가슴은 봄날의 꽃몽우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른 봄이 찾아온 듯, 어디선가 청아한 새소리도 들려왔다.

한국은 19세기 폐쇄정책을 써서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시킴으로써 도태되어 20세기 초 나라를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맞은 21세기에 ICO를 전면 금지시키고 폐쇄의 길로 가는 역사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는 터였다. 개인의 삶도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받아들일 때 성장하듯, 한 사회도 열려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번영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번성한 것이나 미국이 짧은 시간에 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열린 사회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북한과 단절되어 대륙과 연결되지 못하고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 더욱더 세상과 열려 소통하는 것이 절실하다.


3월 초에 한국은행 본점 팀과 다시 회의를 하였다.  JY가 세계은행 블록체인 연구소의 활동에 대한 발표를 하고, 내가 블록체인 기반의 송금, 채권 및 증권 발행, 정보 공유 플랫폼 및 공동 연구 등 다양한 협력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한국은행 측은 현재 진행 중인 가상화폐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에 관한 연구와 보고서 준비에 몰두하겠다고 했다. 당분간은 어떤 실질적 적용보다는 거리를 두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찰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으로도 이런 대화의 창구는 열어두겠다며 그 문을 완전히 닫아 빗장을 걸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할 때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꺼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한국은행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고자 하던 바람은 그렇게 닫히고 말았다. 삶에서 동반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홀로 갈 수는 없는 길이기에 다방면으로 나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12. 인공지능 프로젝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