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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4. 2021

에필로그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곳으로부터 네가 하는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everything you do flows from it.) - 잠언 4:23


“꿈이 없는 삶은 사는 게 아니에요!”

열여덟 살 소녀는 흐느끼며 여린 목소리로 말했다. 2021년 10월 13일 아침, 나는 식사 준비를 하며 뉴욕타임스 팟캐스트(Podcast)를 듣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전까지 그 나라의 여성 최초 법관이 되리라는 꿈을 품고 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소녀였다. 아프가니스탄 경찰이었던 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경찰이 되었던 그녀의 오빠는 탈레반이 점령하자 탈레반이 자신들을 처형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리라는 두려움에 빠졌다. 누군가 그 아버지에게 딸을 탈레반에 결혼시키면 가족이 살 수 있으리라 말했고, 그 아버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딸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구타는 오빠와 심지어 남동생들의 구타로 이어졌고 견디다 못한 그녀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다. 조선시대처럼 여성의 인권이 없는 그곳에선 혼인에 앞서 남자 집의 어머니와 중매인이 혼인할 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러 오는데, 그들은 그녀 손목의 자살 흔적을 보고 퇴짜를 놓았다. 그러자 아버지와 남형제들의 구타는 더욱 가혹해졌고 그녀는 결국 인권단체의 도움을 얻어 탈출했다. “전 여전히 아버지, 어머니, 제 가족을 사랑해요. 너무나 보고 싶고, 그들이 제가 떠나와서 혹 탈레반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았을까 두렵고 걱정스러워요. 제가 한 결정이 잘한 것일까 후회도 되고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 직원들 생각이 났다. PAT2를 교육시키며, 중앙은행 워크숍에서 몇 번 만났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삶도 탈레반 점령 이후 이렇게 달라졌을까? 미국이 지난 20년간 $2조 달러, 20년간 매일 평균 $3억 달러를 쏟아부어 세우고자 했던 아프가니스탄은 부패로 인해 무너졌다. 아프가니스탄이 붕괴되던 마지막 순간, 한때 세계은행에서도 일한 적이 있는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대통령은 숨겨두었던 미 달러화를 헬기에 가득 실은 채 도망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뉴욕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그의 딸과 워싱턴 D.C.에서 부유한 삶을 누리는 그의 아들의 얼굴도 공개되고,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는 수억 달러를 빼돌렸다는 그에 대해 미국이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 보고했다.  

그도 세계은행에서 일할 때는 빈곤한 이들을 생각하고 부정부패를 개탄하는 보통 사람이었을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기 위해 택한 길이 부정부패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은 그런 종말을 향하고 있었을까? 어느 한순간 그의 마음에 옳지 않은 길을 택해 바퀴벌레 한 마리를 들여놓고 그 벌레가 그의 온 마음과 그가 속한 사회까지도 온통 오염시키고 온갖 질병을 일으켜 무너질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일까?

오래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Harvard Business Review: HBR)에 "어떻게 자신의 삶을 평가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버드 MBA 교수 크리스튼슨 (Clayton M. Christensen)은 그의 마지막 수업에 학생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그중 마지막 질문이 "네가 감옥에 가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how can you be sure to stay out of jail?)"였다. 그는 1979년에 졸업한 자신의 하버드 동기들의 운명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그중 몇몇은 감옥에 가고 점점 많은 이들이 불행하게도, 이혼하고, 자녀들로부터 소외되어 동창회에 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옳고 그름 사이에서 선택할 때 무의식적으로 일상에서 종종 한계 비용 원칙(marginal cost doctrine*)을 사용합니다. 우리 머릿속의 목소리는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는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이번 한 번 만이니 괜찮습니다.'… 원칙을 98% 지키는 것보다 100% 지키는 것이 더 쉽습니다. 제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계비용을 적용해 '이번 한 번만'에 굴복하면 결국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튼슨의 글 인용

크리스튼슨 교수의 글을 다시 읽으니, 내 대학 시절 회계학 교수님 생각이 난다. 노랑, 빨강 단풍꽃으로 관악산의 가을 정경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눈부신 가을날 이어서일까. 그날의 수업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교수님이 잔잔한 음성으로 하신 말씀은 또렷이 남아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것이 자네들 인생에 축복이 되기보다 저주가 될 수도 있다네. 자네들은 항상 최고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고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한국을 떠나온 지 20년이 되던 해인 2019년 가을에 날마다 한국에서 조국 일가의 비리 소식이 끊이지 않고 촛불시위, 삭발시위 등으로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을 때였다. 나는 <직선과 원>이라는 짧은 글에 서울대 재학생이 선정한 '부끄러운 동문' 리스트를 언급했었다. “1위 조국, 2위 유시민…. 조국은 두해 전에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의 북콘서트에서 '김진태 의원이 저희 학교 학생들이 뽑은 ‘최악의 동문’ 3위에 오르신 분입니다. 1위는 우병우, 2위는 조윤선, 3위는 김진태입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어느 기사에 난 것을 읽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세계은행에서 보낸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요즘 또 한차례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화천 대유'라는 기사가 나라를 뒤흔들고 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전 세계에선 ‘판도라 페이퍼'라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2016년에 터졌던 파나마 페이퍼 이후 2017년엔 ‘파라다이스 페이퍼'라는 제목으로 기업의 조세회피지를 통한 탈세를 헤쳤다면 이번엔 초호화판 생활을 하는 연예인, 왕족, 정계 거물들의 조세회피지를 통한 탈세와 부정을 들추어냈다. 파라다이스 페이퍼는 국제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기자단의 공조로 비리가 파헤쳐진 반면, 한국은 기자 출신의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부정 축재의 도면을 그릴 줄 아는 회계사,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조계, 정재계 인사를 모두 포함한 한국 역사상 초대형 부패를 창출해내었다.

데이터 마이닝과 인공지능을 활용해 부정부패의 패턴을 인식하고 다음 부패가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는 모델, 블록체인 기반의 공공 기관 거래의 기록 및 탈세 예방 등등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부정부패 없는 사회, 모든 사람이 하늘이 부여한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공명 정대한 사회를 꿈꾸며 열심히 일한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흐느껴 울며 인터뷰를 마치는 아프가니스탄의 열여덟 살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패한 세계 곳곳에서 보았던, 잊히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찢어진 티셔츠, 반바지에 나무 작대기 하나를 작은 손에 쥐고 황톳길에 소를 몰고 가던 대여섯 남짓해 보이던 우간다 소년, 맨발로 호텔 앞을 서성이며 구걸하던 예멘의 어린 소년, 필리핀 마닐라 길거리에서 종이를 덮고 누워 있는 부모 곁을 서성이다 물병을 들고 가던 내 동료를 쫓아오며 물을 달라 구걸하던 벌거벗은 어린아이…. 모두 부정부패한 크고 작은 권력자들이 나라를 피폐하게 한 곳에 남겨진 아이들이다.


굳이 이민을 생각하고 이 나라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을 두 번이나 지났다. 내 인생의 한여름과 같았던 삼, 사십 대를 쉼도 없이, 정신없이 세계은행에서 보냈다. 때로는 폭풍우에 때로는 지독한 땡볕에 지치기도 했지만, 끝나지 않을 듯한 한여름이 지났다. 선선한 아침,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여름 동안 열심히 뿌렸던 씨앗들이 바람에 날려 어느 곳엔가, 언젠가는 싱싱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나의 여름날 꿈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당신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도움을 요청해라’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기억하며.


* 대체 투자를 평가할 때 기존 투자액 및 고정 비용 등을 무시하고 대신 각 대안이 수반하는 한계 비용과 한계 수익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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