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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Jul 18. 2022

거기 누구 없소

바나나 공화국. 바나나를 미국으로 공급하는 중남미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술꾼에 도박꾼이었던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단편 소설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명 오 헨리가 횡령을 하고 온두라스로 도망가 6개월간 생활한 후 쓴 글에서 생긴 말이다. 그는 단편집 <<양배추와 임금님>>에서 ‘바나나 공화국’으로 중남미 국가를 일컬었다. 미국의 기업들이 바나나 플랜테이션 사업으로 온두라스와 주변 국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국가들의 경제를 쥐고 정치에 개입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이 단어는 20세기에 중남미 국가뿐 아니라 석유, 자연 광물, 혹은 농작물 등 단일 일차산품의  수출에 주력하여 외국 자본에 좌우되는 나라를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 되었다.

21세기 들어 미국을 가리켜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시장 붕괴로 공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와중에 미 경제학자 폴 그루그먼은 ‘우리는 핵무기를 가진 바나나 공화국이 되었다’고 뉴욕 타임스에 썼다. 그를 이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바나나 공화국 미국’이라는 글에서 ‘도둑정치 (kleptocracy),’ 즉 이익은 사유화되고 부채는 공유화되는 나라, 권좌에 앉은 이들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힘든 것은 하루하루 일하며 살아가기 바쁜 대다수에게 지우는 나라, 소수의 번영을 위해 이성과 양심을 저버리는 나라가 바나나 공화국의 특징으로 헤지펀드와 투자금융회사를 구제하는 미국을 짐바브웨, 베네수엘라와 같은 수준의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렀다.

2013년에는 부채에 허덕이는 미국이 국회에서 부채 상한선을 높여 더 많은 돈을 빌리지 않으면 공무원에게 급여를 지급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국회에서 공방이 이루어지는 동안 결국 정부가 문을 닫는 사태에 이르렀다. 2010년에 미 연방정부 공무원이 된 내 남편도 출근을 못 하고 집에 머물렀는데, 한국의 부모님과 통화할 때마다 “정부가 문을 닫는 나라가 다 있냐?”며 못 미더워하셨다. 당시 바나나를 수출하는 탑 10 바나나 공화국의 특징으로 채무가 많아 부도를 낸 역사를 가리키며 끊임없이 빚을 얻어 이자를 갚고 정부 지출을 하고 있는 미국을 꼬집어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렀다.

2016년 10월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는 외국 정부나 기관으로부터 거액의 기부를 받은 클린턴을 공격하며 “이번 선거가 이 나라가 거액의 기부나 외국 정부에 휘둘리는 부패한 바나나 공화국이 될 것인지 진정한 자유국가로 남을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라고 유세했다. 이에 클린턴은 “그녀를 가두라(Lock her up)”고 외치는 트럼프를 향해 “그는 정치적 반대파를 가두는 바나나 공화국의 독재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2017년부터 미국은 진정한 바나나 공화국의 독재자와 부패 정권을 가진 바나나 공화국이 되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공화당은 부유한 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세제개혁을 단행하고, 미국 역사에 없는 족벌주의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자격 미달인 자신의 충신들을 요직에 앉히고, 언론 탄압과 부패한 정부 관행을 감시하는 인사들을 잘라내었다. 바나나 공화국의 어원이 미국에 종속된 남미 국가에서 시작되었듯이, 트럼프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퓨틴에게 종속되어 미국을 그 어원에 충실한 바나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2020년 6월 4일엔 진정한 바나나 공화국의 또 다른 면모, 군부의 등장도 드러내었다.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대낮에 대로변에서 백인 경찰이 수갑까지 채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땅에 눕혀 얼굴이 눌린 채인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날마다 미국 곳곳에서 시위가 격화되고 있을 때였다. 워싱턴 D.C. 백악관 주변에도 날마다 많은 시위대가 몰려왔다. 내 큰아이도 친구들과 함께 생명의 소중함을 그린 푯말을 들고 시위에 나갔다. D.C. 내 시위는 합법적이고 어떤 폭력도 동반하지 않은 평화적 시위였다. 

 난데없이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나타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몰아내고, 전투 장갑차가 진입해 들어오고, 상공에는 전투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장면이 TV 뉴스에 나왔다. 전투병은 심지어 호주 방송국 취재원으로 당시 상황을 보도하고 있던 기자에게까지 폭력을 가해 생방송으로 그 장면이 호주에 방영되기도 했다. 나는 내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이게 현실인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학교 앞에 전투경찰이 배치되어 있던 상황을 겪었고,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가 복학한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한국의 5 공화국 시절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민에게 전투 장갑차에 전투비행이라니! 

바나나 공화국의 또 다른 특징이 폭력성이다. 한국의 5공 시절 전투경찰이 교내에 진입해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기도 하고 잡혀간 학생 중 고문 끝에 숨진 사례도 있었다. 1982년에 엘살바도르에 2주간 머문 조안 디디온은 <<살바도르>>라는 책에서 그들의 끔찍한 폭력성을 그렸다. “정오에 사람들은 눈이 가려진 채로 끌려와 마을 중심가에서 살해당했다.” 대낮에 대로변에서 경찰이 사람의 목을 8분 46초간 무릎으로 눌러 숨지게 하는 미국. 추락하는 나라의 모습에 참다못해 시위대에 나선 75세 노인을 경찰이 밀쳐 땅에 머리를 박아 피가 흐르는데도 쳐다만 보고 전진해가는 미국 경찰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죽어가도 아랑곳없고, 경제는 마비되어 많은 이들이 경제활동을 잃어 힘겨워하는데 주식시장에 쏟아부은 돈으로 가진 자의 가치만 더욱 올리며 마치 주식시장만 오르면 경제가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나라. 없는 이들은 좁은 공간 열악한 환경에 모여 살아 더욱 바이러스에 쉽게 노출되고 바이러스에 걸려도 보험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도 없는 나라. 지난 3월 LA에서 열일곱 살 난 한국계 소년이 바이러스 증상으로 병원에 갔다가 보험이 없어 쫓겨난 후 결국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고 얼마나 원통했던지.

7월부터 선별된 국가로부터의 여행객에게 문을 연 유럽은 미국인 여행객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바이러스를 통제하지 못한 위험국이라고. 2012년에 남미 수리남에 처음 출장 갔을 때 한국 여권 및 다른 국적 여권을 가진 동료들은 모두 무비자로 통과했는데 미국 여권을 가지고 갔던 나는 공항에서 수수료를 내고 비자를 받아 나갈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남미 나라 중 몇몇은 미국에 보복성으로 비자를 부과한다고 들었다. 이젠 의료도 제대로 못 갖춘 나라로 전락해 미국 여권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는 곳이 점점 더 줄어들지 모르겠다. 

나는 어쩌자고 이런 바나나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를 자처했을까.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우리들이 서로 힘을 합해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 존 F. 케네디의 명언을 기억하라고 누군가 말한다. 하지만, 그를 죽인 이도 이 바나나 공화국의 숨은 얼굴임을 기억하며 나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주저앉는다. 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이, 거기 누구 없소?

(2020.7)


제2회 코즈미안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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