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사일을 또다시 쏘아 올렸다.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남부 항구도시 커슨 (Kherson)에서 러시아군이 밀려나고 있으며, 전세가 불리해진 러시아가 핵을 사용할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다.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집에 침입해 그 남편을 공격한 극우주의자 데이비드 드파프 (David DePape) 사건과 관련해, 이 난입이 공화당을 비난하기 위한 민주당의 자작극이라는 거짓 음모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런 터무니없는 음모론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 2018년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의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17명을 죽인 니콜라스 크루즈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22년 11월 2일 저녁, 세계뉴스의 헤드라인이다.
지옥을 묘사하는 영화 속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암울한 뉴스로 가득하다. 암담한 심정이 되어 침울한 가운데, 얼마 전 읽은 헤르만 헤세의 전기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헤세는 독일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이후 스위스에 정착하기는 했어도, 독일인으로서 그가 그 생애 동안 겪은 두 번의 세계대전은 더욱 그를 괴롭게 했다. 특히 1914년에 발발한 1차 대전 당시 그는 개인적으로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린 그의 아버지가 1916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으며, 그의 아내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요양소에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그는 한 깨달음에 이른다.
절망적인 자신의 개인적 상황과 세계대전의 대참사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자기 불행의 책임을 언제나 다른 곳, 이를테면 부모님, 부인, 사회적인 강요에서 찾았듯이 독일에서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떤 곳, 즉 영국인, 국가 또는 불균등한 경제발전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사람들이 각자의 책임을 묻기 시작할 때 이러한 폭력의 고리가 비로소 끊어진다고 보았다. “우리들의 불행에 대한 책임… 전쟁에 대한 책임.. 모든 죄악과 비극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어떤 이념이나 주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만, 우리들의 인식과 의지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으로 아무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일을 맡게 되어 열심히 일했다. 프로그램을 테스트하고 발표도 잘했지만, 프로그램이 실제 채택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그 프로그램을 감사해 문제점이 없음을 사인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인사권을 쥔 내 보스에게 감사할 담당자를 지정해 달라고 했는데도 그는 결국 감사할 직원을 지정하지 않아 프로그램이 실제 적용되는 단계로 넘어가질 못했다. 그해 내 인사평가 때 내 보스는 그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못한 책임을 내게 물었다.
나는 한 직장 선배에게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그때 그 선배는 내게 말했다. “나도 이곳에서 초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지. 나도 그땐 억울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인한 실패를 내게 책임을 돌리는 건 부당하다고 항변했지. 하지만, 그때 내 보스가 내게 말했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나 상황도 모두 고려해서 대응안을 찾는 것을 배우라고. 억울하다고 불평하고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대신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맞이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도록 해야 한다고.” 돌이켜보면, 선배의 말이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 변하고, 세계가 나로 변하면서 새날은 밝아오는 것이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문학적 표현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곳곳에 암울한 전운이 감돈다. 미국은 제2의 남북전쟁으로 치닫고, 러시아 푸틴이 3차 대전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다. “나는 독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에겐 인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 헤르만 헤세는 전쟁의 난국 속에 인간적 가치를 찾는 일을 돕기 위해 포로가 된 병사들에게 책을 보냈다. 다달이 1만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발송했다 한다. 1차 대전을 겪으며 그의 대표작 <데미안>이 탄생했다. “전쟁을 묵인하는 한 전쟁의 공범"이라고 한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지옥 같은 뉴스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그저 묵인함으로 공범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미주 한국일보 2022.11.5일 자 주말에세이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