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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Sep 07. 2020

구근을 심으며

튤립 (Tulips)

한국에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심에서 자란 나는 나무나 식물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 오빠 둘 밑에서 선머슴애처럼 자라면서, 엄마가 키우시는 화초에조차 관심을 주지 않아 꽃 이름도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정도나 알 뿐이었다. 미국에서 앞뒤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면서 정원을 가꾸어야 할 필요때문에, 나무와 화초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다행히 이웃이나 직장에 조경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있어 자문을 구하여왔다.

하지만, 이제까진 어여쁘게 활짝 피어있는 화초들을 사다가 마당이나 화분에 옮겨 심는 것만 했지, 씨앗이나 구근을 심어 화초로 키울 엄두는 내지 못했다. 활짝 피어있는 화초도 사다가 심어놓으면 말라비틀어지거나, 시름시름하다 죽곤 해서 아이들은 “엄마가 심기만 하면 결국 죽는데 왜 자꾸 화초를 사 오느냐?”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다, 내가 정성을 들여 각 꽃의 기호를 파악해 햇볕이 드는 자리에 따라 놓아주고 물과 영양분을 주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꽃들이 피기 시작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올가을 튤립 구근을 샀다. 어느 날, 한 가게 입구에 들어서는데 색색의 튤립 사진이 붙은 구근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봄이면 앞집 마당에 늘어선 튤립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곤 했던 스스로를 떠올려 한 봉지 집어 들었다.

덜컥 사 들고 오긴 했는데, 이걸 심으면 물을 날마다 주어야 하는지, 화분에 심어도 되는지, 양파 모양 비슷하게 생긴 구근의 어느 쪽이 아래로 가야 하는지 몰라, 차고에 구근 봉지를 놓아둔 채 차일피일 미루며 잊고 지냈다. 오늘 아침 집 앞에 놓인 화분의 베고니아 잎들이 얼어서 시들해진 것을 보고, 구근 봉지 안내서에 첫서리가 내리기 전에 심어야 한다는 경고를 기억하며 더 늦기 전에 구근을 심기로 했다. 화초 박사로 불리는 친구에게 어떻게, 어디에 심어야 할지 물었다. ‘봄에 꽃이 피는 구근은 땅에 심어서 추운 겨울을 나야 봄에 싹을 내고 꽃을 피우게 되니, 화분에 심어 온도가 일정한 집안에서 키우는 건 안 된다'고 했다.

어렸을 적 배웠던 ‘봄에 심어진 벼는 여름 땡볕을 지나야만 누렇게 익으며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물며 화초와 곡식도 숨이 끊일 듯한 추위나 땡볕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버티어낸 후에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생각게 했다. 그 순간, 어제 어린이들 한글 글짓기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한 한인교회에 갔을 때, 심사위원들이 모여있던 방 한쪽 벽에 장식된 데칼decals이 떠올랐다. 초록 잎이 달린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갖가지 나비들이 날고 있고 그 나비들 가운데 ‘사랑은 나비와 같다. Love is like butterflies.’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나비는 고치 속에 갇힌 애벌레에서, 그것도 한 번의 고치가 아닌, 첫 고치를 파괴하고 해방되는 듯한 순간, 두 번째 고치에 갇히고, 또다시 그 고치를 파괴하고 나오면, 세 번째 고치,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고치에서, 나비가 된다. 하지만, 그 네 번째 고치에서도 그 고통과 인내의 몫을 다 채우지 못하면 훨훨 날 수 있는 나비가 되지 못한다. 어느 날, 숲을 산책하던 한 사람이 고치 안에서 날개를 펄떡거리는 나비를 보고 안쓰럽게 여겨 나뭇가지로 고치를 헤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치에서 해방되어 나온 나비는 잠시 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고치 안에서 날개의 훈련을 충분히 겪지 못하고 너무 빨리 해방되었던 나비는 날개에 힘이 없었던 것이다.

구근이 한 계절의 혹독함을 이겨야, 애벌레가 네 번의 고치를 거쳐야 자신을 이루어낸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얼마나 많은,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이겨야 온전히 자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첫아이를 낳고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가 목을 가눌 힘을 얻도록 엎드려 놓았던 때가 떠오른다. 고개를 들고 끙끙거리다 힘이 빠지면 고개를 돌려 뺨을 바닥에 대고 쌔근대며 드러누워 있었다. 젖을 떼는 날, 분유와 이유식으로 넘어갈 땐 꼬박 한나절을 울며 버티었다. 돌 즈음 걸음마를 배울 땐, 몇 자국을 내딛다 엉덩방아를 찧고는 한동안 다시 기어 다녔었다. 그 아이가 이제 대학원서를 제출하느라 에세이를 쓰며 끙끙댄다.

고치 속 나비의 날갯짓이 안쓰러워도 훨훨 날 수 있는 나비가 되도록 기다려야 하듯, 아이의 성장 마디마디가 안쓰러워도 지켜보아야만 한다. 성인이 된 내가 견디어내는 고비도 더욱 온전한 삶을 향한 걸음임을 잊지 않고, 때로는 잠시 주저앉아도 다시 걸음을 내딛어야겠지.  구근을 땅에 심고 흙을 덮으며 모두가 올겨울을 잘 견디어낸 후, 내년 봄에 색색의 자태를 뽐내며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2016.11.13)


워싱턴문학 제 20호 2017년 발행본에 포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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