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벌은 외로움
한동안 내 모든 관심과 걱정은 아들의 입대였다. 아들은 집에서 20분 거리의 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아서 왔다. 매 주말 먹을 것을 싸들고 면회를 갈 수 있다. 이제 아들한테 가는 내 관심은 이번 주말 치킨을 사갈까.. 피자를 사갈까..로 줄어들었다.
아들 일에 한 시름 놓고 나니 나는 괜히 울적해졌다. 내가 원래 그런 성향의 사람인지.. 무슨 문제가 있는건지... 사람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건지... 아무 걱정거리가 없으면 어김없이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없었는데 우울했다. 딸이 개학해서 학교에 가고 나니 이제 더욱 한가해져서 지난 주 어느 날은 죙일 밖에 포탄이라도 터지는 것마냥 가슴 졸이면서 집안에 웅크리고 이 기분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러다가 남편이 와서 함께 밥을 먹고 나니 뭔가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조금 생겨났다. 아직도 무거운 엉덩이를 온 힘을 다해서 끌고 운동을 하러갔다.
체육관 문을 들어서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다.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유난히 놀라면서 반가워하기에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가 지금 새로운 다큐멘타리를 준비하고 있는데(이분의 직업은 방송작가) 자료를 번역할 사람이 필요했고 내가 떠올랐지만 연락처가 없어서 난감해 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일 년 전 동네 커피샵에서 마주친 이래로 한번 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순간에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놀랄 만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골 아프다.. 거절했을 텐데 덥석 일거리를 받아 들었다. 내가 우울한 이유가 걱정거리가 없어서 라면 이 일거리를 받아 들면 기한 내에 해줘야 하는 걱정이 우울감을 이겨주겠지.. 하는 바램으로.
그런데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우울감은 해결 방법이 없는걸까? 다른 사람들도 한번씩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인 이상 어쩔 수없는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감기에 걸리면 며칠 앓다 나을 것을 알면서도 열이나고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르면 괴롭다. 며칠후에 괜찮아 진다고 하는 말이 괴로운 증상들을 없애주는 건 아니다. 웅크리고 지나가길 기다릴 수도 있지만 운동을 하고 식생활을 개선해서 감기에 안걸리는게 훨씬 낫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했다. 이 우울감의 정체가 뭔지.. 이 우울감을 예방할 방법이 뭔지..
내 우울감의 정체는 가만히 들여다보니 외로움이었다. 더 자세히 보면 그건 근원적인 외로움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인 외로움이었다. 남들은 다 함께인데 나만 혼자인 느낌. 나만 내쳐진 느낌. 나만 못났다는 느낌.
어릴 때, 나는 흑백논리자였다. 네말도 옳고 내말도 옳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둘 다 옳을 수는 없으니 둘중 누가 옳은지를 가려야만 했고 그러려고 항상 누군가와 싸워야했다. 내 딴에는 진리추구였지만 누군가는 "네가 틀렸다"는 내 말에 다쳤다. 나는 나한테 실망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실망하는 걸 봐야했고 그건 엄청난 슬픔이었다. 나와 똑같다고 믿었던 친구가 나랑 다른 의견을 내거나 내 모습에 실망하면 나는 슬퍼졌다.
다시 슬퍼지지 않기 위해 나는 가면 뒤에 숨었다. 남들에게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적당히 눈치봐서 말하고 친절하게 상대방 비위를 맞췄다. 처음엔 내가 세련돼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점점 자존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진짜 나를 감추다 보면 내가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편 먹고 나를 골탕먹이는 기분이었는데 알고보니 나를 비웃고 있는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나 자신이었다.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혼자서 우울해진다면 그건 내가 나한테 실망했기 때문이다. 걱정거리가 없을 때 우울해지는게 아니었다. 항상 우울한데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 우울을 잠시 잊은 거였다.
친구가 외롭다는 나에게 말했다. 외롭다는 건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이 안봐줘서 힘든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싶다는 네 마음 때문에 힘든거라고.
친구의 말이 맞다면 우울해지지 않으려면 걱정거리를 만들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접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내모습을 꾸미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모두에게 호감을 받는 사람들도 있고, 호감도 비호감도 아니지만 누구든 만나면 편하고 솔직한 사람들이 있다. 전자는 선천적으로 운동을 잘하거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처럼 본능적으로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인간관계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양쪽 모두 인간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나는 이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상의 무게를 좀 덜어내기로 한다.
소홀히 한다기 보다는 둔감해지자는 의미. 내쪽에서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고 보자는 의미. 들리는 것만 듣고 보이는 것만 보자는 의미. 안들리는 걸 듣거나 안 보이는걸 보지 말자는 의미.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자는 의미 그중에서도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의미.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니 대중의 사랑을 바라지는 말자는 의미. 그들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지 말자는 의미. 그들이라는 필터에 걸러진 내 모습을 꾸미려하지 말자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