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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 진희 Sep 28. 2020

나의 인생 돌아보기

싱가포르에 적응하기 - 15세에서 21세까지 (PART 5)

내가 O'Level 시험 통과 후 입학해 다니게 되었던 Temasek Polytechnic은 실무 위주의 대학이다. (아, O'Level은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 마무리 단계에서 보는 시험인데, 영국 교육제도에서 치르는 일반교육 수료증이다.) 내 학교는 흔히 말하는 전문대라고 보면 되는데, 한국에선 4년제가 아니면 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싱가포르에선 오히려 직종과 상관없다면 굳히 4년제 대학을 가거나 학위를 따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폴리테크닉에선 직업을 위한 준비를 전문가들로 이뤄진 교수진이 시장의 흐름에 맞춘 실전적 프로그램들을 구성해 잘 진행한다고 본다. 


그래픽 디자인과는 여러 반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각 반마다 20명 정도의 학생들이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 학교는 아담한 테라스 형식의 긴 건물이 이어진 형태로서 다양한 수업을 하는 시설을 갖춘 강의실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때 첫 해 후 학교는 대폭 성장하여 현재의 매우 큰 부지에 이주해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나이도 다양하고 배경도 다양했다. 나처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지만, 사회생활하다가, 다른 대학 다니다가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게 다채로운 집단에 끼게 되자 갑자기 성인이 된 느낌이었다. 


배정된 반이 머무는 단체 교실은 학생마다 주어진 커다란 책상이 있었고, 학생들은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자신의 자리를 '꾸미기' 시작했다. 다들 예술 감각이 있어서인지, 교실 안은 마치 전시회장 마냥 구석구석 장식품과 예술작품이 어우러졌다. 수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날로 쌓여가면서 각자의 책상은 자신만의 '보물'들로 채워져 갔다. 첫 수업부터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디자이너로서의 사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했고, 학생들은 예술적 혼을 불사르며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 날밤도 새고 경쟁하며 작품을 만들어 제출하는 날이 이어졌다. 


수업은 디자인의 기본적인 교양 수업부터 캘리그래피, 사진 촬영, 도자기 공예, 다양한 드로잉, 패키징 디자인, 로고 디자인, 광고 디자인, 설치 미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했다. 모두 직접 작품을 만들어 제출해야 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손으로 완성하는 매우 실험적이고 도전이 많은 과정이었다. 내가 후에 한국에 돌아와 대학원을 다닌 경험에 비하면, 현지에선 교수와 학생들이 친구처럼 어울리며 깊은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하며 서로 배우는, 수직적이거나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래서였는지 캠퍼스에선 연애도 참 다양하게 발생? 했었고, 대학 생활은 가히 매일 역동적이었다. 


이때 싱가포르에 있는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모두 다녔던 것 같다. 예술 센터는 물론 전시회, 갤러리, 공연장, 영화관까지 두루 섭렵하게 되었고 예술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견해가 넓어진 기회가 되었다. 반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돈만 생기면 주변 국가들을 여행하기 시작한 것 같다.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앙 지점에 위치해서 여행을 다니기에 최적화된 국가라는 사실을 이때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런 즐거운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첫 해 후부터 고민이 생겼다. 디자인 활동을 하면 할수록 왠지 허전했다. 디자인은 특정 시장의 용도를 위해 제품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만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열심히 만들고 나면 더 공허했다. 이걸 죽을 때까지 하며 살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지?'라는 고민이 더 심각해져 갔다. 그 고민은 동시에 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되었고 내 인생의 새로운 방황이 되었다. 이때 작품을 만들며 불쑥불쑥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주목받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스스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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