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4
뽕따맛 탄산수가 없는 곳으로 떠나기, 94일 전
탄산수를 즐겨 마시는 (거의, 물처럼) 저희 부부는 최근 '뽕따'맛이 나는, 정확히는 '뽕따'향이 나는 탄산수를 발견했습니다. 복숭아, 파인애플, 배, 요구르트, 라임, 레몬, 맥주, 그린애플, 청포도 등 많은 종류를 먹어봤지만 이렇게 저희 둘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탄산수는 처음입니다. '뽕따'라는 쭈쭈바 아이스크림을 모르실 수도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소다맛' 이라고 해야겠네요. 몇 개 남은 파인애플 향은 봐도 못 본 척하고, 소다 향만 자꾸만 줄어듭니다. 남편은 마실 때마다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제 베트남 가면 이거 못 먹겠지? 거기 팔려나?"
거기 안 팝니다. 이게 뭐라고 벌써부터 못 먹을 생각에 아쉬울까요.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즐겨야겠지요. 아쉬운 마음에 평소보다 더 많이, 빨리 마시는 건 아닌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남은 파인애플 향 탄산수가 조금 안쓰러워집니다. 떠나기 전까지 남아있을 수도 있겠네요. 남편이 이 글을 볼 테니 빨리 처리 부탁합니다.
' 아쉽다'라는 문장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쉽다]
1. 필요할 때 없거나 모자라서 안타깝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2. 미련이 남아 서운하다.
떠나서 타국을 여행하면서 살게 된다면 아쉬울 것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30분이 지났습니다. 생각이 안 납니다. 아니, 아쉬운 게 '뽕따'향 탄산수가 다... 인 걸까요. 오늘 일이 조금 힘들긴 했습니다. 며칠 전 D-100일 때,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남편에게 "여보! 100일 밖에 안 남았어! 너무 좋아~" 하면서 엉덩이 씰룩 쌜룩 대며 춤췄었는데, 오늘은 '94일이나 남았네...' 라며 시무룩한 상태이긴 합니다. 이러다 보니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져 아쉬움을 덮어버리는 걸까요. 아마 이 주제는 떠나고 난 뒤에 다시 꺼내보아야겠습니다.
만약 떠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뽕따맛 탄산수가 그렇게 맛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싫어하던 겨울 출근길도 떠난다는 생각에 기꺼이 다니게 되는 것처럼, 떠난다는 건 현재를 더 명료하고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자면 누구나 생의 끝은 찾아오니 가끔씩 그 끝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삶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끝이 아니더라도 하루에서 그다음 하루를 '떠난다'라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조금 벅찬 하루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하루라 생각하면 의미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순간'에서 '순간'으로 '떠난다'라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의 의미가 아주 깊어지고 우리의 삶의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인애플 향 탄산수도 떠나면 못 먹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골고루 잘 나눠 먹어보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