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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Nov 29. 2023

핸드폰 번호 바꾸기

D-93

핸드폰 번호 바꾸기, 93일 전핸드폰 번호 바꾸기, 93일 전

퇴사 후 제일 먼저 할 것 


    바로, '핸드폰 번호 바꾸기'입니다. 


    저는 현재 '연구 간호사'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CRC (Clinical Research Coordinator)으로 '임상연구코디네이터'입니다. 이 직업은 아무래도 의학적 지식이 도움이 되서 간호사를 선호하긴 하지만 간호업무가 주는 아닙니다. 임상연구를 설명하고 진행하는 업무를 수행하지요. 연구 대상자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야 하는 포지션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연락처를 알아야겠지요. 업무폰이 지급받지 못하면 담당자 번호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전 업무폰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연구가 아니라 다양한 연구를 맡게 되고 아주 가지각색의 대상자들을 저장하게 되고 그들에게 제 번호가 저장됩니다.


     제가 그 연구의 담당자이니까 당연한 거겠지요. 그렇지만... 버겁게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연구 동의서에서부터, 연구 설명 후 고민해 보겠다는 대상자들, 결국은 하지 않는 대상자들에게까지 제 번호는 주어지지요. 연구 기간이 끝나서 저는 그 대상자를 지워도 그 대상자는 여전히 제 번호를 가지고 있어서, 저와 관련 없는 병원 내 예약 업무나 관련 일로 전화가 오곤 합니다. 저녁 데이트 중에도, 여름휴가기간에도, 늦잠 자고픈 주말 아침에도....... 연락은 옵니다. 이러다 보니 차라리 스팸전화나 보이스피싱 전화가 반가울 지경입니다.


참고 견디고 있던 것


    오늘 이 주제를 쓸 생각은 아니었고, 사실 글감 리스트에도 없던 주제였습니다. 갑자기 쓰게 된 이유는 연구 원외광고에까지 제 번호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동하는 일이 많아서 자리에 전화기도 원내번호도 있지만 거의 쓰지 않아 제 번호밖에 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병원 내 사람들도 벅찬데 모르는 불특정다수의 전화를 받는 일, 생각만 해도 두렵고 싫습니다. 이미 윗선에서 결정 난 일이라 이걸 안 하겠다는 건 그만두겠다는 걸 뜻합니다. 이제 3개월이 남았습니다. 아, 눈물이 울컥 나더군요. 당장 그만두고픈 충동이 솟구치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겨우 꾹꾹 눌러내는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부분을 많이 견디고 있었구나... 다시금 느낍니다. 분명 D-96일 차 글에만 해도 익숙하다고, 편안하다고 했는데 말이죠. 


    제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확실한 것이 좋습니다. 제 일상과 일의 경계는 더더욱 마찬가지이죠. 제가 선택해서 밀착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적당한 거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불특정다수와 소통의 통로가 계속 열려있다 보면 자꾸 그곳으로 제 에너지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데이트 중에 주말에 전화가 올 수도 있죠. 그 전화를 받지 않더라도 그 순간, 이미 제 시간이 오염되는 느낌이 들고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합니다. 일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했지,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참고 견디던 부분이었다는 걸 이렇게 다시 알아차리게 되네요. 다른 건 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닌가 봅니다. 익숙함에 덮인 불편함을 발견하게 되니 퇴사 명분이 하나 더 생겼네요. 



93일이라는 시간


     내일부터 받을 불특정 다수의 전화를 생각을 하니 벅차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퇴사일을 당기는 거, 안될 거 없죠. 그렇지만, 좋은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지금껏 착하고 말 잘 듣는 직원이었다고 하지만 10번 잘해도 1번 나쁘면 나쁜 것만 기억되기 쉬우니까요. 퇴사가 나쁜 행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계속 다닐 거라 예상하고 있는 윗선이 있고, 그 윗선이 배신감도 느낄 성향이라 '퇴사하는 사람=나쁜 사람'일 수 있죠.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좋은 마무리는 하고 싶습니다. 또 어떻게 압니까? 제가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지 말입니다. 하하. 가끔 이런 망상은 어떤 도덕관념이나 사회체제보다 더 큰 통제력이 있는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 브런치에 D-DAY글을 작성할 때, 오늘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더더욱 후련함을 느끼겠지요. 진짜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제 93일 후면 제 핸드폰 번호는 내 가족, 내 지인들만 있겠지요. 내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카카오톡 목록에 있겠지요.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나의 시간을 배려하면서 연락을 해주며, 만날 약속을 잡으면 그때부터 즐겁고 신나는 사람들로만 가득할 그날을 그리면서 조금 더 기쁘게 견뎌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퇴근길 지하철은 운동삼아 늘 오르내리던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탔습니다. 아주 작은 보상이지만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견딜 힘을 이렇게나마 비축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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