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4
지난겨울 한파가 계속되던 날 수도계량기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온 적이 있습니다. 34년을 살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방송을 했었는데, 자기 전에 깜박하고 수도꼭지를 틀어놓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황했지만, 다시 정신을 붙잡고 검색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언 수도관을 녹여야 해결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작전명: 플레임 그라운드] *지정한 위치를 중심으로 하는 불 마법진을 설치한다
1. 물수건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수도관 감싸기
2. 비닐봉지에 물 데워서 수도관 구석구석 놓기
잠옷차림에 패딩을 껴입고는 1,2번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위이 이이이이이이 이이이 잉'
전자레인지 소리만 울려 퍼졌습니다. 걱정이 됐습니다. 처음 겪는 일, 남편도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동파될 경우, 수리비만 몇십이라는 후기에 어떻게든 해내야 된다는 압박감이 들었습니다.
'제발~ 돼라~'
뜨거워진 수건들과 물주머니를 대야에 담아 들고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습니다. 급하게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굉장한 긴급 상황이었습니다. 서둘러, 동파예방방지로 지급된 바람방지 뽁뽁이스티커를 떼어내고, 수도계량기가 있는 곳의 낡은 파란 고무덮개를 열었습니다. 스티로폼도 있고, 이전 주인이 구겨 넣은 옷가지도 있었습니다. 하나 둘 빼내고 나니 본체인 수도계량기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휘리릭 불더니 바람방지 뽁뽁이스티커가 저 멀리 복도 끝을 향해 날아가버렸습니다. 이 정도면 누군가 저를 괴롭히려는 거 아닌가, 타겟팅해서 스킬을 쓰는 거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으니 망상은 접어두고, 일단은 아파트 복도 끝에 마실 나가 있는 그 친구를 잡아와 집 안으로 신경질적이게 내던졌습니다.
'별게 다 말썽이야! 으휴'
그 이후 그새를 못 참고 식은 수건과 물주머니를 여기저기 쑤셔놓고 덮개를 닫았습니다. 한 번에 될 거라 생각했던 거 오만이었죠. 다시 수건과 물주머니를 데워오고, 이 사이클을 세 차례 반복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용일까? 절망감이 사로잡혔고, 그 와중에 물주머니가 터지면서 복도에 물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뿌려진 물은 겨울왕국의 '엘사'가 마법을 쓴 듯 바로 순식간에 얼어버렸습니다. 그걸 본 제 머리도 얼어버렸습니다. 여전히 계량기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빨개진 손끝으로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여보, 우리 수도 계량기 언 거 같아...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봤는데 가망이 없어 보여... 돈 많이 든대.. ㅠㅠ'
'헐... 어쩔 수 없지 뭐 ㅠㅠ 자기 너무 고생했어...'
'내가 어떻게든 해냈어야 하는데......'
카톡을 보내는 사이 몸이 조금 녹더니 머리도 다시 재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는 끝낼 수 없어! '
다시 폭풍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몇십을 날릴 수는 없었습니다. '드라이기 요법'을 발견합니다.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용 시 오히려 수도관이 녹거나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가까이서 쏘이지 말고 멀리서 약하게 서서히 녹이는 게 관건이었지요.
[작전명 변경: 헬브레스] *전방을 향해 손을 뻗어 손에서 불을 뿜는다.
'멀티탭 준비, 드라이기 준비, 온도조절을 위한 수도관을 감쌀 수건 준비 완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비장하게 문 앞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덮개를 벗기고 수도계량기를 노려봤습니다. 뜨거운 눈빛으로 한번 데워준 후에 조준 후 드라이기를 틀었습니다.
'위이 이이이이이이이이 이이이 잉'
드라이기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면서 위협적인 배경음이 깔립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모릅니다. 계량기의 눈금이 꿈쩍합니다.
"오오오오오오오~"
성공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서 보니 싱크대의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제 온몸의 세포들이 신나서 춤추는 걸 느꼈습니다. 온몸이 위로 상승하는 느낌? 제가 느낀 감정은 성취감이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가 수도계량기에게 옷을 입히고 스티로폼 갑옷도 입히고 망토도 씌우고 그렇게 마무리까지 했습니다. 하는 와중에도 바람이 거셌지만, '아이돈케어' 상관없었죠. 성취감과 기쁨에 추운지도 몰랐습니다. 다시 들어와 카톡을 보냈습니다. 손가락 끝이 빨갛고 터치가 잘 안되는거 보니 어지간히 추웠나봅니다.
'여보, 나 해냈어! 내가 녹였어!'
'어? 어떻게 했어? 다행이다!'
'여보, 나 엄청났어... 진짜 고생했다고 ㅠㅠ'
'어떻게 한 거야?'
'흐흑 ㅠㅠ 나중에 들려줄게... 일단 좀 씻고...'
'어어, 그래. 다행이야. 돈 굳었네! 어떻게 했어, 진짜?'
그렇습니다. 남편은 MBTI 'T'입니다. 저는 'F'고요... 하하. 이렇게 마무리가 좀 허무하게 끝났습니다만, 저에게는 엄청난 성취감을 안겨준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세포도 기억하고 있는지, 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는 동안에 어깨가 으쓱, 엉덩이가 들썩합니다. 지금까지 몇십만 원의 지출을 굳힌 한 아내의 셀프 영웅담이었습니다. 그때의 나에게 엄지척 날려봅니다. '역시 너야! 후훗'
주말 사이 날이 추워지면서 이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경험 이후로 1. 날씨예보확인 2. 영하 5도 이하면 수돗물 흘려놓기 - 절대 아까워하지 말기 는 꼭 지키고 있습니다. 밤새 나는 쪼르르르르 소리가 '나 얼지 않아, 걱정 마~'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때의 고생을 기억하기에 저와 같은 직장인들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채, 틀, 녹. 채우기! 틀기! 녹이기!
우리 마음 동파 예방법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래와 같이 제 방식대로 정해보았습니다.
채우기: 평상시 내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기 , 취미, 책, 사람 등등
틀기: 마음이 안 좋을 때는 글 쓰며 흘려보내기, 글쓰는 시간 절대 아까워하지 말기
녹이기: 얼어붙은 마음을 비난하기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천천히 기다리면서 녹이기
날은 매섭게 추워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은 늘 따습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