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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Dec 27. 2023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부세요.

D-65

퇴사 통보


    일을 그만두기 65일 전입니다. 원래 계획은 새해가 되고 1월 2일에 퇴사하겠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매니저님께 그만둔다고 미리 언질을 준 상태였고, 새해 돼서 보스에게 말하고 채용공고를 내겠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점심때쯤 매니저님이 저를 향해 은밀한 손짓을 해서 다가가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 보스가 별 말 안 해?"

음? 그 짧은 한마디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물음표들은 불안감을 만들어냈죠.

        "? 네~ 별말씀 안 하시던데요? 왜요?"

    "아, 오늘 사라 씨 그만둔다고 말했거든."

        "아?? 오늘요? 하하. 뭐라고 안 하셨어요?"

    "아... 아니 뭐 일 잘해줬는데 가게 돼서 아쉽다고 하시지. 또 그런 사람 구할 수 있을지 걱정하시고..."

        "아... 그러셨구나. 어차피 말해야 되긴 했는데, 뭔가 좀 눈치 보이네요. 하하"

어차피 다음 주에 말하나 지금 말하나 별 차이 없기도 하고, 다른 의도로 미리 말씀하신 게 아니란 걸 알아서 어색한 웃음으로 솔직한 심경을 말했습니다.

    "뭘 눈치 봐. 공고는 1월부터 날 거 같아~알고 있어~"


    그렇게 예정밖에 조금 이른 퇴사통보를 했습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합니다.


안녕, 나의 불안아


    65일이 남은 지금, 저와 남편은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한 게 아니란 걸 대화를 통해 느낍니다. 그는 그 나름의 고민이, 저는 저 나름의 고민이 있었죠.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이후에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만약에'를 생각하면서 각자의 플랜을 짜는 중입니다. 남편은 투자와 현금흐름을 계산하고 저는 디지털노매드를 준비하고 있죠.


    '만약에'는 불안을 자아내지만, 어떤 상황을 가정함으로 인해 대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하고 대비책을 짜보더라도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도 맞지요. 경우의 수는 수십, 수백 가 지니 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기꺼이 겪겠다고 마음먹고 마음먹는 데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속해서 월급 받으면서 살아오던 우리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자꾸 올라옵니다. '잘'하고 싶은 거겠죠. 그렇게 불안은 '잘'살아보라고 '잘'해보라고 저희를 조금 살벌하게 독려합니다. 불안은 인류가 '생존' 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기제라고 합니다. 익숙한 삶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거 자체는 생존에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 거지요. 불안이 내 안에 있음을 조금 감사해 볼까 합니다. 제가 '도전'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꽃과 촛불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부세요.


    제목을 읽으면서 한번 따라 해보신 분 있으실까요? 눈을 감고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심호흡하는 거지요. 최근 보고 있는 미국드라마 '매니페스트'에 나온 대사입니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 지크가 불안해하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있는 베벌리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부세요~ 네네 한번 더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부세요~"


    이 장면을 보자마자 저도 한번 따라 해봤습니다. 심호흡하세요~보다 더 따라 하기 쉽고, 더 깊은 호흡을 할 수 있었지요. 더 깊게 꽃향기를 맡고 싶고, 아른 거리는 촛불은 꼭 한 번에 끄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내 앞에 있고 아른 거리는 따스한 촛불이 있는 장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말이죠.  


    불안을 환영하되 제 멋대로 날뛰게 둘 수는 없습니다. 달래고 달래 봅니다. 그리고 느낍니다. 숨과 숨이 주는 이완을, 그리고 살아있음 자체를 말입니다. 내 안에 사는 불안에게 꽃향기를 맡게 해 주고, 촛불의 따스함과 그걸 끌 수 있는 기회를 수시로 제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살아있으니 당장 급할 거 없다고, 꽃향기나 마시고 촛불이나 끄면서 그렇게 놀고 있으라고 말이죠.


오늘 밤 잠들기 전, 꽃향기를 맡고 촛불을 불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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