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집에서 그날의 기분
진한 나무향이 나는 호텔 로비의 자동문이 거창하게 열리니, 고급스럽게 살고 싶은 이상과 허황 사이로 초대된 익숙한 느낌이다. 로비에서 흐르는 음악이 또각또각 하이힐과 제법 어울린다. 나 긴장한 건가? 약속 장소로 향하는 계단을 향하는데 벌써부터 아찔하다.
덴카이라는 나무 팻말의 일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뜻을 찾아보니 하늘과 바다, 입구 근처에서 곧 하늘과 바다 사이를 열고 들어가는 나를 상상했다.
식당 문은 좁았다. 내 몸이 겨우 통과할 만큼 정도로 문이 열려있다. 두꺼운 나무문을 무겁게 옆으로 밀고 들어갔더니 새로운 공간으로 순간 이동한 듯했다. 체리목 인테리어와 높은 천장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꼬치구이의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일본식 유니폼의 직원들이 정갈하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마치 라라 랜드의 세트장 같다. 검은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식사를 하고 있다. 나와 상관없이 즐거운 배경인물들로 가득 찬 좁은 공간이 다른 세상으로 느껴졌다.
예약된 자리에 안내받았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온 흔적은 있어 뒤에서 순간 나타날까 봐 설레었다.
2008년 홍콩에서 비행을 마치고 갔던 홍콩 공항의 일식집이 떠올랐다.
비행을 마치고 나면 피곤했지만 아드레날린이 남아있곤 했다. 비행기 엔진이 꺼져도 프로펠러의 기운은 남는 법, 난 잠시 후 급격히 진이 빠질세라 집에 갈 힘을 충전하기 위해 초밥과 생선 지느러미가 들어있는 따뜻하고 고소하게 비린 사케 한잔을 주문했다.
도자기인 사케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마시면 사케가 나를 포근하게 녹여주었다.
그때 나는 비행을 마친 직후라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원래 술을 잘하지 못하는 데다 피곤한 상태여서 금방 얼굴이 빨개져버렸다. 술에 약해서 그럴 줄 알면서도 유독 혼자 마시는 따뜻한 사케가 위로와 낭만을 줄 것 같았다. 스시바에 앉아 여독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었다. 그렇게 사케잔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스쳐갔다.
크리스챤디올 소바쥬 향기가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그가 나타나 내 옆에 앉는다. 멋지게 나이 든 중년의 중후함이 검은테의 안경과 잘 어울린다. 옆으로 서로 슬쩍 아껴보는 눈빛도 마음에 든다.
“나에 대한 느낌이 어때요?”
내 이상형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정말 그 말이 나올까 봐 다른 말로 돌려 표현하느라 머리와 마음이 뒤엉킨다.
어.. 와 음.. 이 말보다 많다. 나는 들킬까 봐 웃기만 한다. 둘러댈 평범한 표현이나,
사물에 빗대어 말할 단어를 찾으려다 보니 꼬치구이 연기 속에 할 말이 사라진다. 지글지글 시끄러움 속에 고요하게 흐르는 음악 속에 기대하는 그에게 답을 줘야 하는데 내 속마음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다 나온 한 마디.
“여러 모습과 장면이 당신에게 있는 거 같아요.”
"사케 하실래요?"
반투명한 긴 술병이 얼음에 감싸인 체 모양과 색이 다른 잔 5개와 함께 나온다. 그는 투명 한잔, 나는 작고 흰 도자기 잔을 고른다.
그는 나를 우유 같다고 한다.
하얗고 뽀얀 특별함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 누구나 좋거나 나쁘다고 논란을 제기할 수 없다고 이유를 펼쳐댄다.
“우유를 좋아하나요?”
나를 좋아하냐는 말이다. 내 마음은 우유 거품처럼 몽글몽글하게 나른해진다. 에스프레소 같은 인생에 우유 한 방울은 무장해제다. 타이트하고 새까맣게 긴장된 삶에 아지랑이 같은 우유가 서서히 몸을 비틀며 스르륵 피어오르듯 말이다. 유쾌한 대화는 나를 혼미하고 어지럽게 한다.
그는 사케고 나는 우유다.
얼굴이 벌게진다. 깔깔거리며 호호 웃으며 음악과 주변의 소음에 오히려 우리의 이야기는 은밀해진다.
홍콩에서는 따뜻하고 무거운 사케잔에 혼자 붉어졌는데, 오늘은 옆에 있는 그의 향기와 차가운 사케가 맑게 흐른다.
일본식 도자기에 얌전하게 담겨온 작은 음식들도 수줍다. 대화반, 웃음반, 설렘 반으로 이미 배가 불러 목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오랜만에 내 마음은 취해버려 닭 껍질, 장어, 가리비, 참치들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1.2.3.. Sit and You.
3초 만에 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친해질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모임에서였다.
어쩌다 옆에 있던 우리 둘은 같이 셀카를 찍었고 난 카톡에 올렸다. 순발력.
나는 그에게서 명함을 받았고, 이름도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홀린 것처럼 진심을 꺼내듯 내 책을 주고 있었다. 첫 만남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시끄러운 음악의 분위기가 나를 아메리카노처럼 바짝 긴장하게 했다. 사교모임에서는 마음이 붕 떠 밝은 성격임에도 나는 은근히 낯을 가린다. 한 사람만 마음이 맞는다면 어떤 모임에서건 자연스럽게 편안히 어울릴 수 있다. 모임의 부담은 모두 친해져야 한다는 목적에서 온다. 그건 정말 어색하고 힘든 일이다.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센스 있는 차림새여서 멋스러움이 배어났다. 일렁이는 검은 웨이브 헤어는 멀리서도 진중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옆이긴 했지만 다른 테이블이었다. 가깝지만 다른 공간에서 추처럼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나의 그 한 명 역할을 했다. 내 마음이 반은 거기가 있으니 그는 안정제처럼 내게 따뜻한 우유 거품 같은 눈빛으로 가끔 나를 덮어 주었다.
사람들과 섞여 들썩였지만, 멀리서 누군가 나의 마음을 가져갔으니 그는 내 허리를 펴게 하고 자세와 표정을 관리하게 했다. 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투명한 사케처럼 고풍스럽고 스파이시하다.
우유 같은 내 도자기 잔과 그의 투명한 유리잔이 입술과 손에 오르내리고, 차가운 사케잔이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2번째 만난 우유과 사케, 우리 사이느은 무엇일까?
서로의 삶에 온도 차가 있듯이, 나란히 앉았던 우리에게 성큼 가을이 와있었다. 뜨거웠던 여름 속, 싱그럽던 나무들이 금방 붉게 물들어 갈 때 즈음, 여름인지 가을인지 너를 뭐라고 부를까 궁금하게 느낄때,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강의 잘하고 잘 지내고. 늘 응원한다고. 힘을 내라고.
잘 지내라니?? 시간이 흐르며 잔이 식어 가듯, 그때의 청량했던 오순도순 잔망스러운 작은 사케잔들은 속상할정도로 미지근해졌다. 손끝에 놓인 카톡으로 침묵이 무겁게 흐른다. 손과 발이 사케잔처럼 긴장하며 차가워졌다. 붉었던 내 볼과 우리 관계는 우유처럼 뿌예졌다.
그의 카톡을 받고 잔뜩 실망한 나는 마지막으로 진심을 말해버렸다. 3초 만에 반했었다고.
두 번 밖에 만나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빠져버려서 하지 말아야 할 속마음까지 말했다. 애써 상황을 붙잡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선후배로 지내자는 말에 우아를 떨며 쿨하게 알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나에 대한 거짓말. 그렇게 수긍해버리기엔 맥없이 끊어진 아쉬운 낭만에 당황스러웠다. 동의하던지, 설득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침묵이었다. 꾹 참아야 숙녀다운 건데 다큰 여자는 꼬시고 싶지만 난 우유를 마시던 소녀가 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성급한 질문들이 얼음을 깨버렸고 결국 우리 사이에 흐르던 사케잔이 오가지 않고 멈췄다. 참지 못하는 솔직한 성격에 창피한 고백이 나와 가슴으로 끙끙대며 소설 속을 살았다.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시공간에 분자처럼 여정을 떠돌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난다. 살아가다 만남의 타이밍이 오면 누군가와 함께 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방향이 달라 서로를 택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우리의 잔이 스쳤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당신의 바다에서 진을 쏙 뺀 지느러미를 넣은 따뜻한 사케를 두 손으로 감싸 안듯이 사랑하고 싶다.
잔이 다시 내 뜨거운 삶에 부딪혀오면 누군가에게 닿기까지 열심히 달려온 그대를 위해 건배를!
나무, 연기, 사케, 우유, 잔을 볼 때면
나는 홍콩 공항의 일식집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