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공간에서 독서하기
비밀 벙커에서 만난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을 비행기에서 읽었다. 주인공인 들쥐 프레드릭에게는 예술이란 행복한 경험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프레드릭은 삶에서 필요한 예술의 기능을 이야기한다. 친구들이 겨울 식량을 모을 동안 햇살을 모으고 잿빛 겨울이 오면 따뜻한 햇살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상상의 색깔로 마음의 그림을 본다.
겨울이 오자 들쥐들은 모아둔 식량을 먹으며 배부르고 즐거웠지만, 식량이 떨어지자 기운을 잃어간다. 이때 주인공은 ‘하늘에 사는 들쥐 네 마리, 너희들과 나 같은 들쥐 네 마리’라며 시를 선물한다. 모두들 행복해진다. 따뜻함도 추위도, 밝음도 어두움도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곧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의 위로를 한다.
뉴욕까지의 비행은 14시간이다.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채로 잠을 자며 뉴욕을 기다린다. 비행기가 밤하늘을 고요히 달리는 동안 하늘의 별들이 반짝반짝 깨어 길을 안내하듯 비춰준다. 중력을 거슬러 일하다 보면 체력의 한계가 온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단한 나에게 유일한 휴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간다.
벙커
비행기에는 승무원들이 쉴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있다. 바로 벙커(Bunker)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입구는 비행기 화장실 문과 유사하다. 비밀번호가 있어 승객들은 들어올 수 없다. 가끔 화장실인 줄 알고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생수 한 병을 들고 사다리를 잡고 올라간다. 입구에는 담요와 베개가 있다. 그것들을 챙겨 몸을 반으로 접어 등을 동그랗게 말고 들어간다. 복도는 사람 한 명이 다닐 수 있는 50cm 정도의 폭이다. 통로 양쪽에 얇은 커튼으로 사적인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비상시 탈출을 위해 분리가 쉬운 칸막이로 나뉘어 있다.
이곳은 카메라 암실과도 같은 공간이다. 어두움에 적응하느라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텅 빈 어둠 가운데 천장을 바라보며 공기구멍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얼굴을 대고 숨을 쉬어 본다. 산소 통로 같다. 이제 쪽잠을 잘 준비를 한다. 파자마로 갈아입을 때는 머리를 다리 사이에 넣는 ‘블랙 마술 상자’가 연상된다. 깜깜한 좁은 공간 속에서 묘기를 부리듯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체인지 완료. 클렌징 티슈로 메이크업을 간단히 지우고 몇 시간이라도 피부를 쉬게 한다. 몸 하나 눕힐 수 있는 공간에서 할 건 다 한다. 몸을 뉘이고 엎드려서 배를 장시간 탈 때처럼 침대 바닥에 배를 납작하게 붙여 본다. 옆으로 누워도 보고 무릎을 세웠다 폈다 여러 가지 자세 중에 가장 포근한 자세를 찾아본다.
안전띠를 가로로 두르고 있으면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눈을 뜨면 주황색 안전벨트 불빛의 사인이 깜박이며 규칙적인 사인이 울린다. 비행기의 미세한 흔들림이 몸 전체에 퍼진다. 몸속 내장까지 진동이 온다. 칸막이 사이로 동료들의 숨소리, 움직이는 소리가 귀 속을 파고들듯이 신경을 자극한다. 어둠 속에서는 저절로 몸 컨디션, 특히 소리에 민감해진다. 일상에서는 마음에 중심을 두는데, 그 정도로 긴장하면서 비행을 한다는 것이다.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으면 미세한 빛 속에서 더듬거리며 독서 등(Reading Light)을 켠다. 고시원의 밤 같은 이 고요한 공간에 촛불 같은 등을 켜고 가져온 책에서 ‘프레드릭’을 만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따뜻한 햇살을 상상하며 긍정적으로 겨울을 견디는 장면이다.
벙커 안은 세상 끝 어딘가의 우주처럼 깜깜하고 춥다. 기내의 쾌적함과 산소량을 위해 약간 낮은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고무로 된 의료용 핫팩을 가지고 다닌다.
나는 칸막이 쪽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그 따뜻한 것을 껴안고 웅크린다. 문득 뜻밖의 감정이 밀려왔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외로움이다.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적적함과 두려움이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 조그만 공간에서 나 자신의 어둠과 직면한다. 손전등으로 나 자신을 깊숙이 비추듯 침착한 자신으로 돌아오곤 한다. 도착지의 여행 일정을 짜기도 하고, 그리운 가족을 생각하거나 미래의 계획을 구상하며 지혜로운 결정에 이르다 지쳐 잠에 든다.
‘자야 하는데 자야하는데자야하….’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돛단배가 깊은 바다로 가라앉듯이 몸이 노곤해진다. 벙커 위로 승객들의 발자국 소리와 분주한 승무원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난 어느새 잠이 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벙커 안의 카펫 위로 나를 깨우러 오는 소리가 들린다. 동료들의 수면을 위해 조심스레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오려고 애쓰는 그 소리가 내게는 코끼리 걸음처럼 들린다. 커튼 바깥에 걸어둔 명찰을 보고 나를 찾을 것이다. 술래잡기를 하듯 숨어 있다가 들킨 느낌이다. 이제 일하러 나오라는 동료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나도 안다고.
겨울을 견딘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이 파자마에서 빠져나온다. 요가로 살짝 몸을 푼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비가 되어 벙커를 나온다. 기내는 햇빛으로 눈부신 낮이다. 드디어 목적지인 뉴욕에 도착한다는 기장님의 반가운 방송이 나온다. 창문으로 뉴욕 시티를 내다보니 따뜻한 카페라테 한잔이 간절하게 생각난다. 도착하면 손에 커피를 들고 센트럴 파크에서 일광욕을 하며 산책하고 싶다.
그 책의 결말에서 들쥐 친구들은 주인공에게 시인이라며 칭찬한다. 꿈을 가진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도 현실에 적응을 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준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할 것이다.
‘지금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내 꿈을 위해 준비 중인 지금은 겨울이지만 언젠가 햇살이 비추는 봄날이 온다.’
나도 사람들에게 지루한 긴 비행 동안 밝고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영향력 있는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 나만의 비밀 공간에서 프레드릭과 함께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보고 느낀 것이 마음에 아련히 남아 삭을때쯤,
쓰고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도자기를 만듭니다. 교육과 강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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