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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Oct 02. 2019

디어 마이 홍콩

사람과 나라도 인연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있다.


-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Dear my HongKong,


“어머! 알버트?! 나 세라야. 기억나지? 나 승무원이 돼서 홍콩에 살고 있어!”

2007년 어느 날, 홍콩의 지하철 안에서 내가 탄 칸의 문이 열렸을 때 많이 본 사람이 탑승을 했다.


알버트는 2000년 구정 연휴에 우연히 알게 된 홍콩 사람이다. 난 인생의 전환점 앞에서 리셋(Reset)이라는 새 출발을 위해 어디든 떠나야만 했다. 복잡한 마음에 혹시 외로울까 봐 선택한 건 방콕 홍콩 여행사 단체 여행! 

이때는 가방을 싸서 훌쩍 비행기를 타는 습성이 생긴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 여행 이후 내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주식차트의 파동처럼 변화무쌍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알버트라는 홍콩 청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비행시간은 4시간. 기내 식사 시간이 되어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던 우리는 노트에 영어를 써 가며, 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소통하게 되었다.

친해질 만하니 한국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도착이 그토록 아쉬웠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그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영어책을 선물로 주며 ‘이 책을 다 읽게 되면 넌 굉장히 영어를 잘하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이 주문처럼 내 마음에 남았다. 한동안 그 책은 책꽂이에 기념품처럼 꽂혀 있었다. 그의 말이 생각나서 몇 년 만에 그 책을 다 읽었을 때쯤 나는 정말 중동에 있는 외국 항공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홍콩의 항공사가 처음으로 한국인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다. 늘 홍콩에서 살고 싶었던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꼭 합격해야만 했다. 여기에 모인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내가 가장 절실하게 홍콩 항공에 가고 싶어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었다. 비행이 너무 그리웠다. 홍콩이 나의 운명이라 믿으며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었다. 항상 홍콩이라는 키워드에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 있으니 단서가 보였다. 

홍콩 항공은 내 운명의 항공사이다. 당시 채용 인원은 경력직 1명이었는데 그 1명이 이미 30살인 바로 나였다. 난 홍콩 항공이라는 곳에 한국인 1기로 입사하였다. 실력의 차이가 꼭 합격의 요인만은 아니었다. 지원자들끼리 실력의 우열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꼭 들어가려고 작정한 사람이 풍기는 호감과 강한 의지로 결정된다. 승리는 결국 내 것이 되었다. 주식 상승곡선의 사자 등에 올라 탄 것처럼 기막힌 타이밍에 합류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망을 이루려는 나의 노력에 온 우주가 도와준 그림인 것 같다. 사실 첫 홍콩 여행 이후로 수년 동안 승무원이 될 날만을 기다렸고, 홍콩을 상상하면서 준비했었다. 그랬기에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알버트를 한눈에 알아봤다. 시간이 멈춘 듯 멍하니, 아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그리워하지만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만나지 않고 살기도 하듯이 우린 그 후로 만난 적이 없다. 피천득 시인의 인연이란 글이 나의 추억 속으로도 들어왔다. 처음 가본 홍콩은 노래 가사처럼 별들이 소곤댔고, 난 운명처럼 첫눈에 반해 버렸다. 누군가 당신은 ‘그곳’을 가졌는가 물어본다면 난 내 마음을 반쯤 두고 온 곳이 바로 홍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사랑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단체 여행 중에 관광버스에서 탈출이라도 하듯 내려서 혼자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은 용기가 생겼을 때부터 여행자와 이방인 같은 삶이 예고되었던 듯하다. 그 날 혼자 홍콩 섬 강가를 바라보며 다짐한 소망과 눈물은 그곳의 야경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종종 힘들고 지칠 때면 훌쩍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 가고 싶어 진다. 홍콩 거리를 걷기만 해도, 숨만 쉬어도 기분이 좋다.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활기가 있는 곳이 그리웠다. 두바이의 럭셔리한 쇼핑몰과 호텔 리조트 같은 웅장함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홍콩에는 있었다. 북적이지만 안정감이 드는 편안함 속에서 아기자기한 삶을 느끼고 싶었다.

두바이는 그런 곳이 아니라, 주로 승무원 동료들이 가족처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인간관계가 단조롭거나 혹은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 홍콩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는 도시로 가슴이 설레어 참을 수가 없는 곳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신 기분처럼 들썩이다 홍콩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모든 것이 친밀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지금도 집 현관문을 열면 신기루처럼 홍콩이 나타날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홍콩과 책, 그리고 커피였다.

향수병을 앓다 승무원을 그만두고 이제는 그리움 타령이다. 나는 비행을 관둬야 외로움과 고립감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향수병과 그리움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은 향수병을 선택하여 우울해도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에 정착하기로 한 사람들은 나처럼 그리움을 추억하며 현실에 적응하느라 각자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내 주변의 항공사 친구들 대부분은 입만 열면 이것 때문에 징징거린다.


얼마 전 홍콩 항공사가 오랜만에 직원 채용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왠지 내가 다시 가야 할 것처럼 폭풍이 몰아치듯 감정이 출렁인다. 후회라는, 충격이 없는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을 했고, 이제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내려놓았는데, 내 꿈이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도 착륙을 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항해 중일지도 모른다. 난 언제쯤 이 땅에 마음을 붙일 수 있을까?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안정감을 찾아 서울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익숙했던 관성처럼, 왠지 잡아끄는 중력처럼 내 마음의 나침반이 어딘가를 향해 미세하게 바르르 떨고 있는 듯하다.

‘지금 너 행복하니?’라고 누군가 물으면 난 아직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최근에는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당연히 홍콩 주식이다. 젊은 날에는 외국 갈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 기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연의 끈이 사라질까 봐 뭘 하든 한 발은 외국에 담그고 있으려는 것이다.

나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던 내가 세계 경제를 걱정하며 공부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시대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2008년 홍콩 경제 위기 때, 항공사의 내부 조정으로 권고사직을 받았던 것을 경제학 측면에서 이해해 보았다. 서점에 가면 정치 경제와 경영 책 코너 근처에는 가지도 않던 내가 요즘엔 재밌어하며 그 책들을 파고들고 있다. 나를 다시 새롭게 이끄는 홍콩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주가가 심하게 빠져도 언젠가는 반등을 하듯이 10년 전 내가 다니던 항공사 또한 당시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좋아하는 나라가 많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승무원으로 비행 중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럼 난, 한 동안 생각에 빠져할 말을 못 한다. 그 사이 정신이 모든 나라를 순간 여행을 하며 필름이 스친다.

베스트가 없다. 모든 나라가, 이 세상 전부가 내겐 베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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