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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Nov 14. 2019

빨간 립스틱에 하이힐 신고 글쓰기

프롤로그- 어제의 승무원이 기록하는 여행

              

나는 일상에서도 여행의 기분으로 살고 있다. 승무원으로 비행하며 다녔던 기분이 일상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추억에는 형태도 모양도 색깔도 게다가 요점도 없었다. 뭔가를 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긴 이야기를 풀어낼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 당시의 일이 지금의 기분과 겹쳐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극사실주의 표현 기법으로 그림 그리듯 비행의 사물과 장소에 대한 기분을 기록했다. 미국의 리얼리즘, 팝아트의 영향으로  내 눈앞에 있는 듯,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내 마음을 현미경에 놓고 들여다보니, 나의 세계를 직면해야 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오른다.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현상을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 디테일하여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의 감정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장소와 사물에 주관적인 느낌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한다.

    


비행으로 브라질 리오(Rio de Janeiro)의 바닷가에 갔었다. 따뜻한 모래 위에 앉았다. 맥락 없는 곳에 누군가 열심히 깨작거렸을 거 같은 정성스러운 작은 구멍들을 발견했다. 바다 생물들이 숨을 쉬려고 내놓은 구멍. 조개, 게. 갯지렁이가 들어 있겠지 싶은 구멍.


길이 있을 줄 알고 들어갔을까. 길을 만들어서 길이 된 건가.
구멍을 파면 무엇이 나올까?
그럼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 볼까?


작은 바다 친구들을 찾을 때까지 구멍을 깊이 파내고 싶다. 더 깊이 파내어 그 안에 엄청난 세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한다. 심술 맞게도 모래를 문질러 구멍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빨대로 꽂으면 금방 저 모양이 나올 거 같은데, 모래 한알씩 나르며 몇 날 며칠을 고생해서 만들었을 법한 저 구멍을.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손가락으로 구멍을 꾹 눌렀다. 죽은 줄 알았던 것이 기억 저편에 꿈틀대며 살아 숨 쉬고 있다. 답답해서 못 참고 터져 나오는 나의 이야기처럼. 내가 여기 있다고 존재를 알리듯 자발적인 외침이 시작되었다.

넓은 해변가, 모래 속에 보호색을 하듯 묻혀 있어서 나도 몰랐던 이야기. 내 경험과 기억에는 거대한 감정들이 모래와 같이 묻어 있었다. 조금만 파려고 했는데 움직이는 신호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들어 올렸을 때, 어마어마한 꽃게면 어쩔까? 살려줄까? 너 왜 거기 있었냐고 놀랐다며 무서워서 도망갈까. 넌 왜 거기 숨어 있었냐고. 게들은 구멍의 수직 아래에 있지 않았다. 옆으로 깊게 파야 나왔다.

비스듬히 삐딱하게 파내야 했다. 누군가 건드릴 때까지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 건드리면 더 깊이 숨어들어 찾지 못하게 도망가 버릴 거다.

'장난인가, 호기심인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인가? 여긴 내가 사는 곳인데, 호기심으로 내 집을 허물어서 망치지 마시지!' 본모습을 정말 보고 싶은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며, 모래 깊숙한 곳에서 수천 마리의 생물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깊이 직면하지 못하고 우리는 어쩌면 게처럼 다른 각도로 조금은 빗나가 점점 사선으로 비스듬히 외면하고 묻어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기억에는 뿌리가 있고, 실체가 있었다. 바로 나였다. 상상도 못 할 무엇인가를 건드려도 무섭지 않다. 도망가면 되니까. 그러나 그 작은 모래 구멍 출입구에 뭐가 있어봤자 그들끼리 소꿉장난으로 만들어 놓은 칸막이 형태의 원룸 정도겠지.      

아니다. 눈을 들어 보니 상대는 바다였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추억 부자인 이 전직 승무원은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를 마주 하는 게 버거웠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통해서 낭만적으로 보려 했다. 예민한 감수성에 눈물이 자주 났는데, 하품이 었을까. 노안이 왔을까.

때때로 나는 감정에 직면하는 글쓰기를 멈추고 영화나 보러 가자며 자리를 피했다. 영화 시작 전 완벽한 어둠 속에서 눈을 쉴 수 있었다. 눈을 다시 떠서 영화 스크린을 마주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영사기처럼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가고 무슨 글을 쓸지 구상을 하느라 기계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은 혼자 보는 큰 세상이 내게 벅찬 느낌을 주는 게 좋았다. 계속되는 비행과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감정의 변화로 매일이 롤러코스터 같았다. 새로움으로 넘쳐나 스스로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감정의 정체를 알고 표현할 수 있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차분하게 하여 더 목적 있는 여행을 했을 것이다.

말로  하면 에너지가 세어 나가고 추억이 날아가버릴 거 같았다. 그래서 나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내 마음에 관한 기록이어서 글이라고 생각 못했는데 그게 에세이란다. 읽고 듣기는 나를 위해 누군가에게 공급을 받는 것이라면, 글쓰기와 말하기는 내 표현 방식으로 주는 행위이다. 그러니 공부해서 남 주는 것이 맞다. 누구든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써야 한다. 소통의 부재일 때 흐르지 않으면 고여서 썩는다. 이제는 내가 살려고 쓰고 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 기억 하나를 떠올리면 볼펜의 잉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줄줄이 이야기가 터져 나오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깜지를 하다가 볼펜이 안 나오면 너무 뿌듯했던 느낌이다.

끝이 뾰족하게 깎인 연필로 노트를 여는 느낌도 좋다. 연필은 노트 위를 빙판 삼아 미끄러지듯 필을 받으면 씽씽 스피드를 낸다. 사람들에게 뭔가를 자랑하려 잔뜩 흥분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왜 쓰려고 하는가? 무엇을 얻기를 원하지?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기록의 습성은 지독한 내향성 때문이었다. 생각이 많고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내면의 자아에게 관심이 높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나의 욕망은 외향성이다.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으로 나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멋진 계획을 찾으려고 한다. 내향성과 외향성이 겹쳐서 나르시시즘 적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으로 여행을 떠난 내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직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만큼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됐다.


 의자에 앉아 또는 침대에 누워도 무엇을 이야기할까 생각한다. 브라질 리오 코파카바나 비치에 있는 여자들이 어떤 수영복을 입었는지 떠올랐다. 비 오는 저녁에 가방을 꾸려 어디론가 나가고 싶게 만들어야겠다. 노트북을 열었다. 열정의 육체적인 표현으로 글을 계속 써봐야겠다.

    




매일이 여행같은, 도자기와 글을 빚으며 강의를 합니다.

sarahmic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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