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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Oct 28. 2019

안전 기분 매뉴얼

미술관으로 가는 승무원의 감각 트레이닝


비행의 서비스와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것들은 기내 안전 매뉴얼을 통해 배웠다.

당황할 필요 없이 매뉴얼을 찾아 펼치면 웬만한 것들은 답을 주었다. 그대로 하면 해결되는 일들이 많았다. 방법을 알게 되니 복잡한 항공기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대하는 것이 든든했다.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있다. 안전 매뉴얼을 모두 외워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행을 계속하려면 주기적으로 시험을 본다. 리마인드 개념이지만 공부해야 할 양이 어마어마하다. 입사하자마자 7주 동안 트레이닝 센터에서 들어가 훈련을 받는다. 매일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외우며 테스트를 받는다. 과정을 마치고 모두 통과를 해야만 이제 윙을 달고 비행을 할 수 있다.


프로에겐 자기 일을 즐길 줄 아는 자부심이 있다. 마음에도 매뉴얼이 있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 괴로운 일들이 없을 터인데. 나도 내 마음의 정체를 알고 싶다. 이유 없이 우울하고 어느 날부터 무기력해진 건 왜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비행 중 가십으로 승무원 동료들과 넋두리를 할 일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기내 안전 매뉴얼을 찾아 나에게 필요한 대처를 하고 싶다.

한때 승무원이 무어길래 늘 멀리서 손짓을 하며 고고하게 나를 애타게 했다. 그럴수록 로망은 강해지고 어서 오라고 보채는 통에 마음이 초조했다.

꿈을 향한 마음은 다양한 감정을 갖는다. 울고 웃다가. 속상하다가도 다시 일어서고, 안타깝고 고맙다. 되기만 하면 걱정 고민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부터 가는 곳은 모두 다 새로운 나라다.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나도 몰랐던 기분의 변화를 겪게 됐다.

 그때마다 나는 콜씩(Call Sick)을 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꾀병으로 병가를 냈다. 그러면 정말 내가 아픈 거 같았다. 외국에서 승무원으로 살다 보면 외로움, 향수병, 시차 적응, 승객의 컴플레인, 비행에서 힘든 일, 육체와 감정 노동으로 애증이 생긴다. 승무원이 이럴 줄 몰랐다고 실망해도 그 일은 원래부터 그랬다. 모르는 것에 익숙하게 넘어가지 못해 마음의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지독한 감정 노동으로 마음 어디는 병이 나게 되어있다.

그 증상과 후유증이 오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 승무원이란 육체적인 노동의 고단함보다는 삼킬 듯한 외로움이 더 컸다. 여행으로 위안 삼고, 값진 경험으로 보상을 받아 겉으로 상처를 덮어 두었으나, 내면이 상한 것은, 퇴사 후 제대로 후폭풍을 맞았다.


좀 더 단순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기분 매뉴얼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우아한 숙녀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 그러기엔 아름답고 쓸모없는 노력의 상징인 미술관이라야 쳐져 있던 삶을 리프팅하고, 얼룩진 마음을 화이트닝 해줄 수 있다. 마음에 패인 주름까지 팽팽하게 펴내는 의식이다. 예술가들의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스토리를 듣고 있자면 나를 투영하며 객관화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프랑스 화가 ’ 마리 로랑생‘의 전시 중이었다. 마침 전문 안내원이 그림 해설을 시작하여 나도 무리를 따라 관중 속에 묻히고 싶었다. 대부분 예술가의 연대기는 한 마디로 우울이다. 지독한 사랑 후에 버려진 마리 로랑생의 삶은 반복되는 잘못된 만남이 있었다. 강한 우울감은 영감을 주는 변환 에너지가 되어 인생 작품을 탄생하게도 한다. 누군가에겐 트라우마가 또는 업그레이드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감사한 경험으로 기억하면 밝은 미래를 살 수 있고, 아픈 경험으로 남겨두면 상처를 안고 어두워진다. ‘책 읽는 여인’의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표정의 여인이다. 전문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그림은 작가가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답이 없는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한 고민 속에 책을 읽는 모습이랬다.


마리 로랑생 <책 읽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913년


나역시 인생의 모든 중요한 우선순위가 겹쳐 삶의 방향 감각을 잃을때가 있었다. 자기 계발서에 왠지 답이 있을 거 같아 유난히 많이 읽었다. 강의를 찾아 듣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미술관에 가서 중세 초상화 작품들을 자세히 보았다. 표정과 피부며 화려한 드레스의 재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그 시대 속에 그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화려함과 답답함이 공존했고, 평범함 속에 행복감이 느껴졌다. 비밀 연애소설을 읽는 듯하다.

마리의 그림에서 그려진 여성들의 눈빛은 표정이 없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무표정을 하니 무척이나 슬퍼 보인다. 마리는 사랑했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언젠가 만날 거라는 막연함으로 평생을 기다렸다. 만나지도 못하는데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깊은 추억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무표정이었다. 어떤 감정을 겪으면 무표정해진다. 나도 마음에 통계를 내듯이 삶과 그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입술에는 힘이 들어가고 정신이 순간순간 멍해진다.

”미술관 혼자 가는 거 너무 좋아하지 마."

대만 친구가 그런 내게 한 말이 있다. 작가가 혼을 담아 인생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모여 있는 공간에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혼자 가면 기운에 눌릴 수도 있다고 했다. 어쩐지 미술관에 가면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들이 많았다.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이고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들에도 인생의 희로애락이라는 저마다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떻게 예술로 승화하여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하여 모두에게 눈물이 나도록 사랑받는 작품을 탄생시켰는지 궁금했다. 아픔을 아는 자만이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할 수 있다. 낮은 자리로 가야 공감할 수 있는 폭과 깊이가 넓어진다.


인생의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삶에 영향이 있다. 연애할 때 상대방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진다. 작품 스타일도 재료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한다. 남는 건 내 삶이다. 작품으로 남기도 하고 글로 남는다.

미술관에서 깨달았다. 고독하고 평탄치 못한 예술가의 삶보다는 평범한 여자가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것. 너무 자유롭다 못해 흘러버리는 세월을 멈출 수 있다면 난 무엇을 남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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