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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Oct 01. 2021

그렇게 가족이 된다

Heaven and the City Season 3 EP 02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날. 그날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은 한 집에 다 같이 모여 전에 없던 풍성한 식탁을 차려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 날이 바로 추석(秋夕). 여기까지는 그 유래에 맞추어 풀어낸 추석의 한 장면이다. 모두가 다 그렇겠지만 각자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남은 추석 명절의 그림은 다를 것이다. 내가 가진 그림은 세 장 정도? 먼저 그 그림들을 펼쳐보고자 한다. 


그림 1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적 주소지인 첫째 큰아버지 댁에 들렀다가 외갓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게 우리의 명절 코스였다. 귀성길은 넘쳐나는 인파로 전쟁 통이었고 입석표를 구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면, 나와 동생은 좌석을 마주 보게 돌려 좌석과 좌석 사이에 만들어진 세모난 자리가 있는지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운 좋게 그 자리를 찾으면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갈 수 있었다. 아부지는 7남매, 엄마는 5남매. 각 직계 가족들만 모여도 스물몇 명을 훌쩍 넘기는 가족 명수. 그 많은 사람들이 4, 5인 기준 가족이 지내는 집에 한 번에 모이니 어디에 어떻게 머리를 두고 잠을 잤는지 모를 정도였다. 맛있는 음식들, 이럴 때나 만나 노는 사촌들, 손에 조금씩 쥐어지는 용돈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잠시 즐겁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오가는 고성으로 변하면서 결국은 어른들의 싸움 한바탕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림 2번. 대학생이 되면서 다른 가족들은 시골로 보내고 난 2시간 넘게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인천으로 넘어가 명절을 보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교회 행사를 도와 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나 외화벌이를 하러 한국으로 온 다양한 사람들. 중국에서 온 분들이 대다수였고 동남아 출신들도 가끔 있었다. 그땐 중국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한 마디 못할 때라 나는 설거지처럼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들만 내내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시골 대신 거길 갔던 이유는 외국인들과 친해지려던 것보다는 그 일을 도와드리러 오는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마음 반, 명절에 많은 가족들과 만나 지지고 볶는 소동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 반이었다. 아니, 어쩌면 후자가 더 컸을지도. 너 다섯 번의 명절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림 3번. 명절에 귀성길에 오르는 걸 멈추려면? 내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내가 새로운 가족을 이끌고 엄마 집을 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한국을 떠났던 내가 다시 돌아와서도,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른 넘어 시집 안 간 딸까지 데리고 친정 가는 게 민망하셨던지 엄마가 먼저 이제 명절에는 내려가지 말자고 하셨다. 어차피 할머니 생신이 추석 명절과 크게 차이 나지 않으니 그때 뵈러 가면 된다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끼리만 명절을 지내기 시작했다. 넷이서 둘러앉아 냉동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왕만두를 빚어 먹었고 할 일이 없어 조금 무료하다 싶은 오후에는 아이스크림 내기 윷놀이, 루미큐브, 동양화 그림 맞추기 등을 했다. 그렇게 며칠을 먹고 싶은 거 해 먹고 가끔 서울 시내 나들이도 가면서 난 더없이 편안하게 명절을 보냈다. 다툼과 소동 없이, 교통체증 없이,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도 없이 조용한 나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는 명절이었다. 어떻게든 해치워야 하기보단 온전히 쉬는 휴가 같은 기간이 된 것이다. 물론, 엄마는 그래도 편치만은 않으셨겠지만.   


그림 3번에 머물러 있던 추석명절 그림이 나는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올해부터 4번이 생겼다. 결혼은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그림을 그려주었다. 드라마에서나 봤고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바로 그 새 그림. 일부러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추석 명절 기간을 이틀씩 나눠 각각 시가와 친가에서 보냈다. 나에게는 시가가, 남편에게는 처가가 새로운 환경이었다.


친가에서 왕만두를 빚어 먹었던 것처럼 시가에서는 왕꼬치전을 부쳐 먹는 게 국룰이었다. 그동안 대부분 어머니 혼자 준비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번엔 나와 남편이 가세하여 세 명이 준비를 하게 되었다. 기름 냄새 정도는 풍겨줘야 명절 느낌 나는 거니깐. 익은 걸 바로바로 집어먹는 건 보너스. 어머니는 오랜만에 다시 꼬치전을 하시게 되었다며 몇 판을 계속 부쳐 주셨다. 덕분에 남편은 꼬치전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왔다. 다른 음식들 준비하시는 것도 도와드리고 몇 가지는 어떻게 하는 건지 보고 배웠다. 우리 집 조리법이 아닌 스타일의 요리들을 보고 배우는 재미가 제법 있었다. 이런 것들로 가정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나게 한다는 걸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양가 하이브리드의 길에 접어든 것이지. 그렇게 준비를 돕고 돌아와서 다음날 저녁에 다시 어머니 댁에 갔다. 시누 가족이 어머니 댁으로 와서 온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시누의 시가가 지방이어서 오고 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다른 때엔 오고 가고 했지만 정작 명절 기간에 같이 모이기는 그간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명절에 맞춰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이는 건 근 십여 년 만이라고. 나뿐 아니라 시가 식구들 모두에게도 이번 명절은 새로운 그림이었던 것이다. 시가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우리 부부가 한 거라곤 그저 저녁 한 끼 같이 준비해서 먹는 것이었지만 뭔가 모르게 모두에게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어느 정도로 K-며느리에 부합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의 평은 후한 편이었다.  


남편은 초등학생 때 해보고 안 해봤다는 만두 빚기를 처가에서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부모님은 우리 부부에게 안방을 내어주셨다. 시골집에 가면 외할머니도 우리에게 당신의 방을 내어주지 않으셨냐는 논리에 바탕을 둔 선택이었다. 할머니와 같은 상황을 맞게 되신 엄마는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왔다며 놀라워하셨다. 추석 당일인 다음 날, 남편은 한가위 배 동양화전에서 1등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가족 신고식을 무사히 통과했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다양하며 색다른 것이었다. 우리가 2인 가구에서 3인, 4인으로 가구 구성원 수가 늘어나게 된다면 그것도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가족이 달라진다는 건 단순히 숫자가 늘어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간들도, 양념 다른 음식들도, 나누는 대화의 주제들도, 어떻게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는지도 지금까지와는 양가 모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어색한 것도, 서투른 것도 많다. 내가 시가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남편은 처가에서 느꼈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 가족만 알고 살았던 우리가 각자의 가족과 처음으로 함께 지내게 되었던 가을밤들. 이런 사건과 시간들을 통해 서류와 기록상의 ‘가족’에서 점차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갈 것이다. 다음 명절은 어떤 그림으로 남게 될지 기대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고 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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