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의 자찬 묘지명과 임종 이야기
퇴계 이황은 자기의 묘명(墓銘)을 스스로 지었다.
나서부터 매우 어리석고 /生而大癡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즐겼으며 / 中何嗜學
만년에는 어찌 관직을 외람되어 얻었는고 / 晩何刃爵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막연하고 / 學求猶邈
벼슬은 사퇴할수록 더욱 걸려들었네 / 爵辭猶嬰
나가다가 자빠지고 /進行之路
물러나 감추기를 굳게 하였네/退藏之貞
임금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漸國恩
오로지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했네 / 亶畏聖言
산은 높디높고 / 有山疑疑
물은 줄줄 흐르네 /有水源源
벼슬 버리고 돌아와 소요하여 /婆婆初服
여러 사람의 비방을 벗어났네 /脫略衆訓
나의 회포는 막혔는데/我懷伊阻
나의 패물을 누가 구경 하리 /我佩誰玩
내 옛사람 생각하니 / 我思古人
참으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네/實獲我心
어찌 알리 후세의 사람들이 /寧知來世
오늘의 내 마음 모를 줄을 / 不獲今兮
근심하는 중에 즐거움이 있고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 구하리 / 復何求兮
구구절절 자신의 살아온 인생 역정을 담담하게 회고하였다.
{퇴계가 병이 위독하니 문생들을 불러 영결하려고 하므로 자제들이 말리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즈음에 보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명하여 상의를 몸 위에 입히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말하기를
“평일에 나의 하찮은 견해를 가지고 제군들과 강론한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죽던 날 아침에 시자(侍者)를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에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게 하고선 조용히 숨졌다. 융경(隆慶) 경오년 12월 8일이었다.} (동각잡기 下)
퇴계는 임종 시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누웠던 자리
를 정돈케 한 다음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 위대한 스승 퇴계의 마지막 순간이다.
{일찍이 퇴계가 본시 은퇴할 뜻이 있었으니, 비록 여러 대의 조정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
으나 그 본의가 아니었다. 일찍이 아들 준(舊)에게 부탁하되, 무덤 앞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이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 하였다.}
남명이 왜 웃었을까.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산 자신도 은사라 칭하는데 부끄러움이 있는데 하물며 퇴계는 정승급 벼슬을 한 사람이 "晩隱"(말년에 은거)이라 칭한 것을 비꼰 것이다. 퇴계와 남명은 동갑나기로 영남의 성리학계를 동서로 나눠 각기 일가를 이룬 유종이고 동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처럼 티격태격한 것이 참 재미있다. 두 사람은 평생 만나지 않았으나 서신은 주고받았다.
젊은 시절 퇴계의 학설에 도전하여 그와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고봉 기대승이 퇴계의 묘지명
을 지어 추모하였다.
"선생의 휘는 황(滉)이요, 자는 경호(景浩)다. 예안(禮安)에 살았고 선대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70에 한가로이 은거하였다. 아! 선생은 벼슬이 높았으나 스스로 구한 것 아니요, 학문에 힘썼으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머리 숙여 부지런히 하여 거의 허물이 없었다. 옛적 선현과 비교하니 누구와 낫고 못한가. 산이 평지 되고, 돌이 썩는다 하더라도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함께 오래갈 것을 나는 아노라. 선생의 옷과 신발이 이 언덕에 묻혀 있으니, 천추만세에 혹시라도 짓밟음이 없을지어다."
기대승이 최대의 존경을 표하며 퇴계를 전송하였다.
나는 역대 인물 중에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같은 아름다운 선비의 교우 관계를 보지 못했다.
퇴계 이황
퇴계 묘소의 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