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일의 건축, 경회루(3)

- 경복궁 경회루에 숨어있는 비밀코드

by jskim

건축가는 건축주의 뜻을 헤아려 건축설계를 한다. 이때 건축주의 명시적 지시는 물론 묵시적 지시도 참작해야 한다. 건축주인 태종의 지시는 간단했다. 기존의 樓가 기울고 위태로우니 바로 세워 튼튼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건축가와 시공자는 기존 누각을 수리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런데 박자청은 그리 하지 않았다. 우선 왜 누각이 기울었는가 원인을 조사하고 분석했다.
기존 누각은 태조 대 경복궁 창건 시(1395년) 건설한 것이니 17년째 된다. 목조 건축이 17년 만에 기울었다면 이는 지반의 문제일 수 있다. 누각이 위치한 경복궁 서북쪽은 북악의 골짜기에서 흘러드는 물이 만나 고이는 지형이다. 그래서 지반이 습하고 무르다. 이른바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습지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박자청은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기존 누각을 수리한들 지반을 튼튼하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전하께서는 오늘과 같은 염려를 다시 하시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존 누각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누각을 세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건축가로서 소극적 시공 수준인 수리는 사실 썩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궁궐 문지기였던 자신을 등용해 준 태종의 은혜에 보답하고 후일의 염려를 불식시켜 드리는 방법은 아예 크고 멋진 새 누각을 지어드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경회루 건축에는 박자청의 건축가로서의 야심과 태종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가 작용했다. 그리고 건축주의 명시적 지시에서 더 나아가 말은 안 했으나 튼튼히 지어 오래가는 건축을 만듦으로써 다시는 왕이 근심하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이 건축주 태종의 진심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새 누각을 짓는 것으로 결정한 박자청은 습한 지반을 고려해 누각의 위치를 현 서북쪽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 사정전 서쪽 방면으로 정했다. 그것은 치조로 긴장의 공간인 사정전에서 누각으로 통하게 하여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완시키는 기능을 고려한 것이다. 즉 경회루의 건축 목적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있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왕의 이완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 습한 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땅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지상에 건설하는 건물이 아무리 훌륭한들 다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박자청은 토목에 밝은 전문가이다. 이는 벌써 창덕궁 건설로 증명이 되었다. 1405년 태종이 머물게 창덕궁을 건설해 드린 것도 박자청이었다. 그로 인해 태종의 신임을 받아 박자청은 문지기 출신으로 초유의 공조판서(국토부장관) 직위에 올랐던 것이다.

창덕궁은 응봉산의 지형과 지세에 따라 건축을 하여 자연 속에 인간이 정주하는 멋진 자연주의 건축 궁궐을 조성한 것이다. 이는 주례 고궁기에 따라 차이나 스타일로 만든 경복궁에서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조선다운 궁궐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 모두 건축가 박자청의 창의적 발상에 기인한 것이다.

창덕궁을 만들 때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으로 진입하여 인정문으로 들어가는 회랑과 마당은 궁의 입구로서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공간이어서 태종은 반듯하게 직사각형 형태로 위엄 있게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박자청은 궁의 기본 전각배치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한 것인데 정작 입구 쪽 회랑공간이 직사각형이면 전체 구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왕의 지시를 어기고 이 공간을 사다리꼴 형태로 약간 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천출이 판서로 있는 것이 못마땅해서 꼬투리만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헌부로서는 좋은 탄핵 구실을 건진 셈이다. 사헌부는 박자청이 임금의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건축을 했다고 즉시 탄핵했다. 태종도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 않은 박자청을 그대로 둘 수는 없어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유배지는 그 사람의 향후 명운을 결정한다. 가까운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은 명목상 유배라는 뜻이다.
1년도 못돼 박자청은 사면을 받고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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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인정문 앞마당의 형태가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모양이다. 진선문을 들어가는 부분은 넓게, 숙장문 부근은 좁게 구획하여 전체 궁궐의 구도와 틀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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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창덕궁 인정문 마당의 예에서 보듯이 박자청의 건축관은 자연의 지세와 형세에 짝하여 인간이 그 속에 들어가 조화롭게 살아야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자연주의 건축이었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인간에게 맞춘 중국과 일본의 궁궐건축과 다른 점이며, 근대시기 자연을 모티브로 하여 인간의 정주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인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과도 차이나는 박자청만의 독창적 자연주의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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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 교회. 안토니 가우디 건축작품이다. 가우디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그는 자연의 곡선과 영감을 건축에 구현하였다. 즉 자연을 인간의 정주에 맞춰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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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건축의 문을 연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표 건축작품인 폴링 워터(낙수장).
라이트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유기적 건축을 고안하였다. 즉 자연을 향해 인간의 공간을 개방하는 콘셉트이었다. 그러나 이들 근현대 건축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주에 자연을 일부 이용하거나 자연과 인간의 정주를 연결하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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