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낙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다.
서기 525년은 신라 법흥왕 12년이다. 그해 6월 18일 새벽에 사부지 갈문왕은 누이와 함께 서라벌 인근에
있는 풍광 좋은 계곡을 찾았다. 음력 6월이니 양력으론 한 여름이어서 더위를 쫒기 위해 새벽에 일찍 온 것이다. 그들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물장구 치며 재미있게 놀았다.
동행한 일행과 식사를 하고난 다음 이 곳을 書石谷이라 이름 짓고 자신들이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반반한 바윗돌 아래 단에 낙서를 하였다.
내용인 즉 이렇다.
"을사년(525년)에 사탁부의 사부지 갈문왕이 누이 성덕광묘와 어사추여랑 등 셋이 골짜기에 놀러 왔다. 식사감으로 물고기를 잡은 이는 누구누구이며 이를 요리한 사람은 누구누구이고 돌에다 기록한 사람은 누구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잘 놀고 잘 먹고 간다는 낙서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골짜기에 누가 찾아왔다. 그들은 법흥왕의 왕비 보도부인과
그녀의 딸이며 사부지 갈문왕의 부인인 지소부인 그리고 그녀의 아들 삼맥종이었다. 아들은 그때 6세였다.
이때 14년 전에 왔던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는 이미 죽은 뒤였기에 동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부지 갈문왕의 아내인 지소부인이 그날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때 썼던 낙서(原銘이라 함) 왼쪽에 추명(追銘)을 새겼다. 내용은 이렇다.
"지난 을사년(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부지 갈문왕이 누이와 어사추여랑과 함께 셋이 놀러 왔다. 세월이 흘러 왕과 누이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기미년(539년) 7월 3일에 갈문왕과 누이가 왔었던 이 서석곡에 우리가 다시 왔다. 이번에 온 분은 모즉지 태왕(법흥왕)의 妃인 부걸지비(보도부인)와 사부지 왕의 아들인 삼맥종이시다."
무슨 말인가.
525년에는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가 서석곡에 놀러 왔는데 14년 후 두 사람은 세상을 떴고 사부지 갈문왕의
부인이 친정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시 서석곡에 왔다는 낙서이다. 이 낙서는 그저 신라왕족들이 경치 좋은 곳에 피서를 왔다가 남긴 낙서에 불과할까. 그런데 그 후의 일을 생각해 보면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서석곡에 다녀간 후 정확히 1년 뒤인 540년 7월에 1년 전 이곳에 있었던 세 명이 신라 정치의 중심에 등장
한 것이다. 7세의 삼맥종이 법흥왕을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가 제24대 진흥왕이다. 나이가 어려 지소부인이 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였다. 사부지 갈문왕은 진흥왕의 아버지이며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이었다. 지소부인은 입종의 부인이며 진흥왕의 모후이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본다.
539년에는 법흥왕이 병환에 있었을 것이니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을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말년에 불자가 될 정도로 독실했지만 불행히도 자식은 보지 못했다. 왕이 아들이 없을 때 후사는 동생이나 조카가
잇는 것이 통례였다. 그렇다면 왕위 계승 1순위는 당연히 사부지 갈문왕 즉 입종 갈문왕인데 그는 이미 죽었다. 그러면 다음 왕통은 누가 이을까. 비록 조선시대 건립했긴 하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비석에는 법흥왕의 동생으로 진종이란 인물이 나온다. 입종이 죽은 후에는 그다음 동생인 진종이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이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며 왕통을 정할 위치에 있는 법흥왕비 보도태후는 어떤 결단을 해야 했다. 왕통을 시동생에게 넘길지 아니면 자신의 딸이 낳은 외손자에게 줄지 그래도 핏줄이 왕통을 이어야 자신의 위치가 견고해질 것이니 선택은 명료했다. 보도태후는 어린 외손자 삼맥종을 후계로 삼아 자신이 왕태후로서 섭정을 한다는 계략을 세웠을 것이다.(그러나 실제는 딸인 지소부인이 섭정을 헸음)
그러기 위해서는 순행을 통해 이를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 539년 보도왕후는 딸과 외손자 삼맥종을 데리고 서석곡을 찾았다. 물론 공개된 순행이니 백성들이 나와서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다음 보위는 입종 갈문왕의 아들인 삼맥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신라의 백성들에게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부지 아니 입종 갈문왕의 흔적이 남아있는 서석곡에 가서 525년에 입종 갈문왕이 낙서한 옆에다
추명을 나란히 적었다. 당신의 아들이 여기 다녀 갔노라고. 아버지가 한 낙서 옆에 아들이 낙서를 한 셈이다.
이는 적통을 잇겠다는 표시를 남긴 것이리라.
각석은 현세는 물론 후대까지 대대로 전해진다. 어찌 종이로 만든 역사서에 비하겠는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각석의 장구함과 가치를 인식한 삼맥종은 왕이 된 후에도 이를 잘 활용하였다. 영토를 넓히고 자신의 공적을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운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진흥왕 순수비가 그것이다.
서석곡의 낙서는 울주군 천전리에 있는 각석을 말한다.
2025년 7월 천전리 각석을 포함한 반구천의 암각화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진흥왕의 낙서가 이제 세계적 유산이 된 것이다.
울주 천전리 각석
우측이 원명(525년)이고 좌측이 추명(53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