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일의 건축, 경회루(8)

- 경복궁 경회루에 숨어있는 비밀코드

by jskim

가끔은 그게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생각게 한다.
인생을 살아보니 좋은 인연도 있고 악연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인연들이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
까? 그것은 먼 훗날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1393년 박자청은 중낭장이 되어 개경 수창궁의 궁궐문을 수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궁궐에 들어가려고 다가왔다. 자청은 소명이 없다는 이유로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냐며 화를 내며 자청의 얼굴을 가격하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래도 자청은 굿굿하게 나갔다. 그 사내는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군 이화였다.

이 소식은 태조의 귀에도 들어갔고 태조는 원칙을 지킨 박자청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지 이화를 나무라고 자청을 칭찬했다. 태조는 자청을 호군에 임명하고 특별히 은대를 하사했으며 내직으로 발령 내 왕을 호위하게 했다. 궁궐을 지키는 경비단에서 대통령 경호실로 발령을 낸 격이다. 자청은 여기서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태조의 신임을 받았다. 벼슬과 직책도 높아져 선공감소감(건축 담당부서의 차관)을 겸하고 호익사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가 맡은 직잭이 동북면 선위사였다. 동북면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그가 무장으로 꿈을 키우던 땅이었으니 박자청을 왕이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선위사란 동북면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을 귀순시켜 조선에 귀부토록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왕의 사자였다. 여기서 자청은 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런데 내가 동북면 선위사 근무를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박자청의 자연주의 건축관념이 이때 배태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자청은 기본적으로 무인이다. 무인은 기질이 괄괄하고 솔직 담백하며 호탕하다. 이런 기질이 토목이나 건축에 잘 어울릴 수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규모 토목건축은 군의 공병대가 동원되었다. 시간에 맞춰 딱딱 공사를 해내는 기술은 군인들의 특기이다. 박자청의 일대기를 쓰고 있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다. 아마 박정희 대통령도 박자청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을 성싶다.

野戰은 넓은 산과 들판을 무대로 전투를 하는 병과이다. 당시 동북면은 허허벌판에 조선인들과 야인(여진족)이 섞여 살거나 출몰하여 야전에 진을 치고 늘 긴장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기록엔 나와있지 않으나 자청의 직책이 선유사이니 오래 상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최소 1년 이상은 동북면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 자청은 산야를 달리고 또 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넓은 시야는 산야를 통해서 형성된다. 산과 들판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곧 토목공사를 하는 것과 같다. 무인은 임무상 자연을 모르면 전투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투에서의 승리는 천지인이 합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天은 기상을 살피는 것이고 地는 땅의 형세를 살펴 진지를 만드는 것이며 人은 곧 군사들의 사기이다.

군인인 자청은 지세와 지형을 이용하는 법을 여기에서 터득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그가 토목 전문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처음 관직이 선공소감이라는 것은 박자청이 토목에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는 걸 의미한다. 다만 동북면 근무를 통해 그의 자연주의 건축관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북면에서 돌아와 선공감사(토목 영선 담당부서)와 공조전서 직을 맡았다. 그리고 드디어 박자청의 자연주의 건축이 빛을 발하는 국책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태종 5년 1405년 태종의 명에 의해 창덕궁 건설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달리 응봉산의 지형과 지세에 맞춰 즉 자연에 따라 자연 속에다 인간이 정주하는 건축을 설계한 전 세계 궁궐건축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자연주의 궁궐 건축의 모범적 사례이다. 중국의 자금성은 자연을 쳐내고 인공적으로 건축한 궁궐이고 일본 교토의 어소 왕궁은 자연을 일부 들여와 차경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관조하는 콘셉트의 궁궐 건축이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방점을 거주하는 인간에게 두었다. 즉 인간주의 건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창덕궁은 자연을 이용하거나 활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다 인간을 던져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의 편안한 삶을 꿈꿨다. 즉 자연의 보금자리가 창덕궁 건축의 기본 콘셉트이었다. 이것이 박자청의 자연주의 건축관이다. 이는 신선과 같은 인간의 이상적 꿈을 구현한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태종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상상이 간다. 태종은 이후로 내내 창덕궁에서 주로 정사를 보며 지냈다.

1412년 경회루 건축에 있어서 누각을 연못 안에 집어넣은 콘셉트도 이런 박자청의 뛰어난 자연주의 건축관에 기인한다. 물론 여기에는 주역의 물을 나타내는 숫자 6이 상징코드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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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문 마당을 직사각형으로 하라는 태종의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 자연의 축선을 살리려고 했다. 박자청은 태종을 존경하고 신뢰했으나 자신의 건축이상에 부합되지 않으면 왕명도 거부할 정도로 강한 소신과 철학을 견지한 진정한 아키텍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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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의 다리를 못 속에 풍덩 담갔다. 기발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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