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시음이라니 왠지 이 수업을 들으면 내가 그냥 술꾼이 아니라 명품 술꾼이 될 듯한 착각에 신청하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술 몇 방 울을 입안을 헹구듯 페어링 한다고 절대 미각이 아닌 내가 한순간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배우면 낫지 않을까? 착각은 자유다. 그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떫고 쓰고 입안을 태울 듯한 알코올 때문에 기침이 날 뻔했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고 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술은 목구멍을 타들어가는 독한 그 무엇일 뿐 섬세한 맛의 감별은 이루 어지 않았다. 하나 같이 독한 술맛이라는 느낌뿐이었다. 네 가지의 술 중에 독특한 것이 있었지만 다시 먹으면 알 수 있을까? 단연코 모를 것이다. 술을 페어링 하다 사레들릴뻔했다. 위스키를 꿀꺽 넘기고 얼굴이 빨개져서 민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술에 초짜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젊은 시절 순진한 내가 술에 입문했을 때는 그저 "잘 마시는구나!"라는 선배들의 칭찬과 계속 부어주는 술을 원샷하면 격하게 좋아지는 술자리 분위기 때문이었다. 잘하는 게 없으니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띄워주는 아싸의 정신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좋아해서 마신 건 아니었다.
난 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 사람이 많은 곳에선 구석에 존재감 없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도 즐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취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사람들의 반응에 적극적이 되었다. 말도 많아지고사람들과의 소통도 잘 됐다.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란 걸 그때 알았다. 잘 취하지 않았고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술자리 예의도 잘 지켰다. 술을 잘 마시고 즐기는 삶이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됐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길에 과하게 마신 술을 토하며 위장이 거덜 났지만 그래도 그땐 젊었으니까...
그런데 중년이 되어 술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혼술도 하게 되었다. 젊은 때 싫어했던 맥주도 잘 마시게 두었다. 맥주를 싫어한 이유는 조금 마셔도 배부르고 소주보다 빨리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맥주가 좋아졌다. 첫 모금이 시원하고 술술 넘어갔다. 금방 알딸딸하다가 마실수록 머리가 명료해지는 느낌이었다. 맥주는 밥 반주로 손색이 없다. 짭짤한 반찬과 밥을 먹으면서 맹물로 입가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맥주로 입을 헹궈주면 반찬의 짭조름함과 밥알의 달콤함이 입을 즐겁게 한다.
안주를 먹고 맥주로 입가심하면 군더더기 없이 입안이 깔끔해진다. 알딸딸해진 기분은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명료한 세상을 아름답게 윤색한다. 위 아더 월드의 세계에서 평화를 외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술은 내향적인 나를 급외향으로 바꾸어 준다. 사람들과의 친하게 된다는 점도 술의 매력이다.
술이 인생의 윤활유 역할을 하지만 과하면 부작용을 일으키기에 나는 조절하며 마시는 편이다. 논리를 잃고 횡설수설하는 것과 몸을 가누지 못해 민폐를 일으키는 것을 경계한다. 나중에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해 봐야 쏟아진 말과 행동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마시는 편이다.
술을 과하게 마시고 필름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남들은 내가 평상시와 같이 멀쩡히 갔다는데 나는 그 밤 내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나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개처럼 기어서 침대에 들어간 것은 기억이 나는데 아침에 발견한 머리카락에 묻은 구토의 흔적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은 아예 기억 속에 까맸다. 그 후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으니 술 마실 때 조심하는 편이다.
술의 두 번째 불상사는 급격히 뱃살을 늘어난다는 점이다.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임신 6개월 상태의 배를 지닌다는 점. 지하철에서 임산부석에 앉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 뱃살 어쩔 거냐고... 싫어하는 운동을 실신 직전까지 해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적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아직도 나는 외식을 하면 습관적으로 술을 시키고 있다. 술의 부작용보다는 좋은 점에 0.01 정도의 더 높은 호감 점수를 매기고 있다. 즐기는 삶에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배운 것은 명품 술을 감별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술은 그냥 술일뿐 마시고 주정만 안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배운 건 스코틀랜드의 명품 술잔이 퀘이치이다
퀘이치는 영국 총리가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취임식에 선물로 보낸 술잔이다.스코틀랜드에서는 술을 퀘이치라는 술잔에 따라 마신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술잔의 상징이 감사, 우정. 평화라는 사실이다.
퀘이치의 손잡이 2개이다. 손잡이 2개를 두 손으로 맞잡으니 무기를 잡을 수 없기에 해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 술잔으로 적군 앞에서 술을 먼저 마시고 상대방이 술을 마시도록 유도하여 싸움을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로운 협상의 수단으로 쓰였다고 한다. 치열한 왕좌의 게임에서 평화의 순간을 선사한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순간 연인끼리 위스키를 마실 때도 퀘이치를 쓴다고 한다
연인끼리 술은 나눠 마시는 로맨틱한 순간 그 감미로운 술잔에 닿았을 입술. 술잔은 마법처럼 머릿속에 서정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치열한 전쟁 중에 있던 두 나라 정상이 퀘이치 담긴 술을 나눠 마시며 닿았을 입술. 마법처럼 싸움의 이유를 잊게 하는 평화가 깃들지 않았을까?
처음에 의도한 배움은 아니더라도 배움에서 의외의 하나는 얻어걸리는 것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