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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도 좋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는

by 레알레드미

jh의 긍정적인 말투와 웃음을 머금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얼굴무늬 수막새가 떠오른다. 눈과 입의 곡선이 부드럽고 복스럽다. 웃으며 말하는 눈매는 친근하고 따뜻하며 다정하다. 거의 2년을 못 보고 지냈는데 만나니 어제 본 것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1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는 치열한 서열의 다툼에서 승기를 놓쳐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가 잔주름은 웃음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몸이 너무 고돼서 약발에 의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수십 장의 문서에서 동명의 이름을 찾아내는 젊은 상사와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보다 두어 살 어린 고시 출신의 지적질을 잘하는 엘리트 상사였다. "그런 상사랑 일하면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걸"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런 게 보이는 상사라 신기하다"며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좋은 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리고 "줄 간격도 자로 잰 듯 집어내서 신경 쓰인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문서를 훑고 또 훑는데 꼭 놓치고 지적을 당한다"며 "지적을 받으면 의기소침해져서 평범한 자신의 두뇌를 원망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힘들겠다"는 내 말에 "괜찮다"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입꼬리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꼬리는 시무룩하니 처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말투에 웃음꼬리가 달려있었다. 웃음꼬리는 날개 비슷한 모양이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긍정의 힘이 그 웃음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승진소식이 오기를 기대했지만 좀처럼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승진 가까이 갔다가 미끄러져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힘 빠지는 말뿐이었다. 우리의 모임도 중단되었다. 회사일만 해도 힘에 부쳐 틈을 내기 어렵다는 그녀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날 수 없지만 멀리서 응원하고 있었다. 작년 말에 드디어 그녀의 승진 소식이 왔다. 값지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당역 파스텔시티 인도 음식점에서 그녀를 만났다.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그녀는 유연근무라 5시 퇴근임에도 6시 30분까지 회사에 잡혀있었다고 했다. MG세대면 가차 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1초도 회사에 있지 않았을 텐데. 자기 시간을 손해 보면서도 30분정 도 늦은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며 반달 미소를 지었다. 회사에 종속된 노비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승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서인지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승진했지만 보직발령 없이 예전 업무를 그대로 하고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경쟁 없는 삶이어서 너무 좋다"라고 말하면서 "요즘 신규 직원들을 보면 하나 같이 다 이쁘다"며 웃었다. "우유를 먹어서 요즘 젊은이들은 허리가 잘록하고 늘씬하고 크다."며 내가 동조하자 "그런데 이쁘다고 할 수 없다."라고 그녀가 말했다. "네가 무슨 홍길동이냐? 이쁜 걸 이쁘다고 말할 수 없게?"라며 나는 웃었다. "성적 농담을 함부로 해선 안되고 얼굴에 대한 평가도 금기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예쁜 OO, 귀여운 OO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내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변해서 이쁘고, 귀엽다는 단어가 불쾌감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아직도 나는 구시대의 유물인 라떼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녀도 나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치다 보니 본성에 기인한 자연발화적 언어 "이쁘다. 귀엽다."란 언어를 쓰는 것이다. 그게 죄일리는 없을 테지만 세대가 바뀌었으니 바뀌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나는 jh의 말을 회사의 한 간부에게 말했다. "직급에 올라 처음 들은 말이 호칭을 바꾸라는 말"이었다며 "그 이유는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공적인 일에 사적 감정을 개입하면 안 된다"며 "직급이 올라갈수록 아랫사람 특히 MG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을 다른 행성에서 온 개체라고 생각해야 편하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난 MG들의 개인적 성향과 똑부러진 일처리, 자신만의 소신이 좋아 보였는데 그것을 싫게 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동안 직장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직원 또한 내가 승진을 위한 야망의 도구로 이용한 적이 없었다. 직장은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친근한 놀이터였고, 직원들은 동료였고 협력자였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함부로 애틋하게 사용했나 보다. 때론 냉정한 사회에서 "이쁜 OO, 귀여운 OO"라는 그 말이 그립고 그 말을 못 들어 우울하다는 동료의 진심을 믿었었다. 이제 와보니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고 소통해 준 복된 사람이었다.


이참에 직원을 대할 때 마음은 그대로 애정이 넘치게 그러나 호칭은 단호하게 공적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려 한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 변화에 나를 맞추려 한다. 그리고 나의 곁에서 함께 일해준 나의 동료를 더욱 사랑하리라. 이것이 새해의 나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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