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하게 사라질 너의 뒷모습에 "안녕",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추억을 단단한 매듭으로 동여맸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의미에서 뭔가 색다르고 굉장한 이벤트로 즐겁게 보내야 될 것 같은 사명감이 싹텄다. 그런데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는 오늘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짐을 꾸려 어디론가 가는 길에 비가 내리면 마음이 우울했다. 오후 12시면 비가 갤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먹빛으로 잔뜩 흐려서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저렇게 잔뜩 낀 구름 속에 해는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망각하곤 했다. 하늘이 잔뜩 흐리면 계속 흐릴 것만 같았다. 떠나야 하는데 무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분이 계속 땅굴을 파고 있었다. 억지로 일어나서 지난 일주일간 쌓인 쓰레기를 정리하고 10시 30분 펜션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점심을 먹으러 연미관에 갔다. 연미관은 제주도청 근방 소방 안전 본부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손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두 테이블 정도였다. 굉장한 맛집을 기대하고 왔는데 사람이 없자 급 실망한 석은 소방본부가 바로 앞인데 근처 소방관도 먹으러 오지 않는 걸 보니 맛집이 아닌 모양이라고 했다. 마지막 제주 여행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실망감에 마음이 언짢았다.
보목포구에서 왔다는 자라물회와 한치물회를 시켰다. 제주도식 물회는 된장 베이스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기본으로 시켜 맛을 보니 국물이 구수하고 깔끔했다. 식초를 넣으니 상큼한 맛까지 더해서 계속 먹게 되었다. 곁들임 반찬으로 고등어 구이가 나왔는데 뼈가 발라져 있었고 짭조름하니 맛있었다. 석이 내 몫을 남기지 않고 홀랑 잘도 먹어치웠다. 섣부른 판단으로 실망하고 흐려졌다. 개이는 냄비 근성의 나를 질책했다.
스타벅스 한라수목원 DT점에 갔다. 아메리카노, 까페라떼, 에그 클럽 샌드위치를 시켰다. 석은 밥을 안 먹는 대신에 커피숍에서 꼭 빵을 시켰다. 저탄 식단으로 밥을 안 먹으려고 하면서 빵을 먹는 건 너그럽게 생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식습관이다. 석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설치더니 스벅에 와서 낮잠을 잤다. 자는 당사자야 상관없지만 앞에 앉은 나는 낯 뜨거웠다. 석은 커피값이 아니라 숙박비를 내야 할 판이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니 나에게도 수치심의 값을 지불해 줘야 할 것 같다.
한라수목원의 광이오름까지는 지금 체력으로는 버거울 것 같았다. 산림욕장 정상까지만 오르기로 했다. 걸어가는 오르막은 더웠으나 정상은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차 안에서 본 배경이 마음에 시를 불러일으켰다. '우주의 도플갱어'라는 시를 제주 수목원 산림욕장 정상에서 완성했다. 조각가는 돌을 보면 그 안에 갇혀있는 조형물이 떠오른다고 한다. 내가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좋은 경치를 보면 뜻하지 않은 어떤 문구가 떠오른다. 그 문구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 의도와 다른 시의 통로 앞에 서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다른 세계에 접어들게 된다.
정상에서 수목원으로 내려오니 월요일이라 제초 작업이 한창이었다. 풀 비린내가 바람에 날아온다. 제초기의 칼날에 웃자란 풀잎들이 잘려 나갔다. 공항 갈 시간이 많이 남아 수목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벤치는 개미들의 놀이터인 듯 싶었다. 개미를 쫓겠다고 모자로 벤치를 가격했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모자 뒤쪽 버클이 떨어졌다. 석은 아끼는 모자 하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