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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산책길

사계절 꽃피는 아름다운 길

by 김 화밀리아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산책이다. 보통 아침 식사 후 집안을 대강 정리 정돈한 후 오전에 동네 산책을 한다. 아파트 주변의 작은 둘레길이지만 실개천이며 작은 호수, 아름드리 공원 등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는 짧은 산책 코스이고 거의 1시간 정도 걸린다. 개울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아파트촌, 카페촌, 초등학교, 유치원, 고등학교가 늘어서 있고 공원의 끝자락에 등산길 입구가 나온다. 가급적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하고 식사 준비하면 시원하고 상큼한 공기로 폐 속까지 맑아지겠으나 반드시 아침을 먹고 출근해야 하는 가족이 있어 일찍 일어나도 아침 준비를 해야 한다. 요즘처럼 무더위엔 아침 일찍 산책하면 좋으련만. 내가 나가는 오전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어 그늘도 없고 따가운 햇볕과 후끈한 공기로 너무 더워서 걷는 게 고역이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으나 만나는 사람들은 나처럼 가족들 챙겨 보내고 나온 사람들이다. 늘 보던 사람들이 나온다. 양산을 쓰고 목에는 젖은 수건을 둘러메고 음료수가 든 작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부지런히 걷는 아낙네들이다. 가끔 할아버지도 만나고 유모차를 끌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로 자장가를 불러주는 젊은 새댁들도 보이고, 학생 같아 보이는 청년들도 있다. 매번 보이진 않지만 잠깐이라도 틈을 내서 운동 겸 산책하는 것이리라. 아, 그리고 반려견과 함께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실 코로나 전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코로나로 만남이 없어 행동반경이 좁아지니 산책을 하면서 심신 단련하고자 홀로 산책을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도 홀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에 다닐 땐 주말에만 남편과 함께 아침 일찍 산책하곤 했었다. 퇴임 후에는 매일 홀로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명상에 잠겨서 혹은 기도를 하면서 걷는다. 하루 중 기도 시간이 내겐 가장 중요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 집에서 하는 것보다는 산책하면서 자연과의 대화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평탄한 산책길에 주변 경관 또한 아름답고 깨끗하게 조성되었으며 개울가의 물 흐르는 소리가 한결 발걸음을 경쾌하게 한다. 길가에 피어있는 야생화, 나무, 잡초들 또한 너무 싱그럽다. 사계절 내내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천혜의 낙원 같다. 봄에는 파릇파릇 올라오는 쑥들을 비롯하여 산수유, 매화, 목련,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 민들레, 토끼풀, 제비꽃, 꽃잔디, 애기똥풀, 붓꽃 등이 만발한다. 여름엔 목수초, 붉은 넝쿨장미, 나팔꽃, 노루발, 금계국, 해바라기, 나리꽃, 금어초, 꼬리조팝나무, 서양톱풀, 능소화, 원추리, 비비추, 으아리, 하늘말나리, 패랭이꽃, 꽃사과 등을, 가을에는 개쑥부쟁이, 개미취, 구절초, 국화, 께묵, 감국, 산국, 조팝나물, 코스코스, 구절초, 단풍나무를. 겨울에는 동백, 한란, 수선화, 나무 위의 눈꽃까지 일 년 내내 꽃들이 산책길을 장식한다. 언덕 둔치에, 바위 틈새에, 공원 의자 밑에, 들판에 풍성하게 피어난다.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게 천국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예쁘고 화려한 꽃들이 여기저기 빼곡하게 피어난다.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처럼 맘껏 위로 또는 옆으로 뻗어나가 산책길 전체에 꽃향기가 가득하다. 모두가 왕처럼, 왕비처럼 대접받는 기분이다.

실개천은 바위들을 공수해 와서 가지런히 쌓은 다음 그 위로 수량을 적절히 조정하며 흘러가게 하여 자연적인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약간의 언덕길로 되어있어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르게 하고 산책길 아랫부분은 작은 호수가 만들어져 두루미, 오리 등이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호수를 출발점으로 길 따라 죽 걸어 올라가 등산로 입구까지 다다르게 된다. 산의 맑은 공기가 우리 마을 전체를 감싸준다. 중간에 체련 단련기구, 분수대, 쉼터 의자, 예쁜 카페에서의 아름다운 음악과 그윽한 커피 향, 나무 데크 위에 놓인 비치파라솔과 탁자 등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편안한 휴식을 안겨준다.

산책을 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즐긴다. 홀로 산책이나 혼자가 아니다. 길가의 꽃들, 시냇물 소리, 새들의 지저귐, 카페의 음악... 이들과 나는 무수한 대화를 즐긴다.

그 옛날 너무나 가난했던 유아 시절과 청년 시절에 배고픔에 지쳐있던 나는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올 수 있을까, 하루 세끼 먹는 밥걱정 안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을까 등 나에게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가난에 허덕였으니까 불가능이라 여겼었다.

지금은 많든 적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내 몸 안전하게 쉴 곳이 있으며, 이렇게 산책할 수 있는 좋은 장소며 배고플 걱정 없이 소찬이나마 매일 하루 세끼 꼬박 챙겨 먹을 수 있고 맘 가는 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값비싼 것들로 장식하며 소위 말하는 강남의 어디 등 부자 동네에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다. 미니멀라이프에 만족하고 날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임을 나이 들어서 새삼 느낀다.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며칠 전 신림동 공원에서 초등교사가 살해된 사건 이후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나 또한 약간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주변의 경치와 대화를 나누며 맘 편히 걸었던 이 산책길이 갑자기 불편한 길로 느끼기 시작한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혹시, 만약에 덤비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등 상상을 한다. 홀로 산책보다는 둘 이상 짝을 지어서 가는 사람들이 눈에 더 띈다.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서만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시내 한복판, 백화점에서도 일어났다. 이젠 어디든 불안하고 겁나긴 하다. 왜 이렇게 세상이 변했을까?

내가 자라온 환경도 무척 열악하고 가난했다. 그러나 가진 것 없어도 사이좋게 나눠 먹는 풍토였고 가난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으며, 없어도 양심 팔지 않으며 노력하여 근근이 저축하면서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가난을 이겨내고자 했던 사람들, 무엇보다도 자부심, 양심, 공경, 예의는 버리지 않는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윤리 시간이 가장 기다려졌고 명사초청 강연회도 자주 열었던 시절. 요즘엔 윤리 과목이 없단다. 수능 때문에 그저 국, 영, 수, 탐구 과목에 모든 시간을 바친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없다. 인간의 가치관에, 자신의 인생 진로에, 극기의 도전에, 삶의 목적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이겨내려는 삶의 의욕을 젊은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재 처한 자기 상황을 늘 남과 비교하여 뒤처진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비관한다.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살면서도 만족하지 않고 위로만 나아가려고 한다. 꾸준히 노력하면서 상승을 꿈꾼다면 바람직할 것이나 노력 없이 안일하게 얻으려는 단순한 생각과 허황된 생활자세가 삶을 더 힘들게 한다. 땀과 노력의 결실은 아주 정직하다.

그래도 후덥지근한 땡볕에서 모자도 쓰지 않고 비 오듯이 흐르는 땀에 흠뻑 젖어 달리며 운동하는 청년들을 보면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반드시 꿈을 이룰 거라고, 이 세상은 그대들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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