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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난 제주도 겨울 여행

2. 서른살 넘어 뒤늦게 시작한 사춘기

by kyoungha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난 여러 사람과 싸웠다. 변덕이 심한 회사 상사하고도 싸우고, 거래처 싸가지 없는 팀장하고도 싸우고, 3년동안 만나온 남친과도 싸웠다. 밤새 꿈에서 여러 사람과 싸우느라 아침에 일어난 나는 기진맥진이었다.


나는 종종 현실의 고민을 꿈으로 꾼다. 꿈에서는 현실과 다른 또 다른 내가 등장한다. 실제로는 서러움과 억울함에 눈물부터 쏟아져 나와 말 한마디 못하는 나인데 꿈에서는 당당하게, 논리정연하게, 오목조목 따지며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신기하기도 하지, 이런것도 심리학적으로 정의 내리는 용어가 있을까?


이미 난 꿈에서 싸움을 끝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뜬 나는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싸울 힘도 없다. 우습다. 단지 꿈이고,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바뀐게 없는데 난 마치 다 해결된 듯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슬며시 화가 가라앉는다.


밤새 꿈을 꿨더니 아침부터 몸이 지쳤다.

시간은 오전 9시. 목욕물을 받기 시작하고, 창문을 열어 날씨를 살폈다. 오늘 제주의 바람은 조용하고 파도는 잔잔하다.

이제부터 뭐하지?


제주 겨울 바닷가
제주 애월읍 바닷가





제주도의 둘째날, 정확히 말하면 세째날이다. 무작정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

어제는 하루종일 잠만 자고 오늘에서야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다시 서울로 올라갈까? 아냐 내려온김에 제주도 여행이나 해볼까? 혼자서? 그래 혼자서ᆢ


일년에 서너번씩 내려왔던 제주도지만 그때는 모두 일이었고 동행들이 있었고, 스케쥴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면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정해진 스케쥴에 따라 이동하고, 밥먹고, 회의하고, 자고, 그래서 오늘은 뭘해야지, 다음에는 어딜갈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 혼자다. 놀던, 쉬던, 돌아다니던, 다시 서울로 올라가던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문제는 나 혼자 뭔가를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낯선것에 두려움을 갖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치 처음 자전거를 탈 때의 두려움 같은, 신나게 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넘어지면 어쩌지?하는 마음, 새로운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애월읍 애월해안로 바닷가


오늘은 일요일.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다. 배가 고파온다. 호텔 조식뷔페도 다 끝났을 시간, 우선 밥부터 먹어야겠다.

핸드폰을 켜서 주변맛집을 검색해본다. 요즘은 핸드폰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다. 뭐든지 검색하면 다 나오고, 모르는 것도 다 알려준다. 맛집도, 맛집까지 가는 방법도, 심지어는 택시까지 불러주고. 급하면 누군가에게 SOS도 할 수 있다. 심심하면 영화도 보여주고, 노래도 들려주니 마치 손안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기분이랄까?


유명하다는 제주 애월읍 고등어쌈밥집. 아쉽게도 1인분은 안된다고 해서 전복뚝배기로 주문했다. 아ᆢ혼자서 하는 여행의 단점, 먹고 싶은 걸 못먹는구나~


이제 고민을 해야한다

오늘 서울로 올라갈것인가?서울로 올라갈거면 근처에서 커피한잔 마시고 짐싸서 공항으로 가면 되겠지만, 남으려면 차를 렌트해야한다. 길치인 내가 낯선 제주도에서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건 무리이고,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택시? 아니다. 그것도 뭘 알아야 택시를 타고 다니지. 정답은 렌트인데 그렇다면 그전에 제주도에 남을지 서울로 올라갈지를 먼저 정해야한다.


지금 이대로 올라가면 내 소심한 이탈은 아무도 모른다. 다시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올라 언제나 똑같이 일을 하면 된다. 그러면 이 일은 나만 아는 퍼포먼스로 끝날 일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며칠을 머무른다면?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무슨 큰일일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며칠 빠지면 큰 일이라도 날 듯 싶지만 세상은 매정하리만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난 잘 안다. 신기하리 만큼 비워진 자리와 시간은 모래가 쓸려 내려와 애써 파놓은 구덩이를 순식간에 덮듯이, 몇시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모래성이 몇시간 후에 가보면 파도에 쓸려 흔적없이 사라지듯이 다 메워지고 채워지는걸 나는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지고 메워질까봐 아파도, 배알이 꼬여도, 속에서 열불이 나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난? 며칠 빠져도 될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러다 짤리면? 모르겠다. 어차피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을때부터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결과를 예측하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다는 본능이 이성을 앞질러 생긴 일이다. 난 학창시절에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를 지금, 뒤늦게 서른이 넘어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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