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움츠린 나, 내면 아이의 손을 잡아주세요
자라면서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소되지 못한 상처나 아픔들은 무의식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불안정한 궤도에 올려놓는다. 또한 이런 마음의 상태는 우리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길 잃은 아이처럼 마음이 그 시절에 머물러있는 한 그 감정으로 계속 현재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처 받은 미성숙한 감정들을 상담심리학에서는 ‘내면 아이(Inner Child)라고 부른다.
내면 아이는,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다시 공감하고 안아주어야 할 내 안의 잔뜩 움츠린 아이와 같은 감정들이다.
아이들은 무(無)의 상태에서 부모나 양육자를 거울삼아 애정과 보살핌을 통해 하나하나 배우고 성장해간다. 정서적 애착을 형성하고, 자아를 완성하고 인간관계에 대해 배운다. 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모두 매 순간순간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매일 처음 만나는 하루를 부여받고 새롭게 부딪혀가는 건 똑같다. 이렇게 모두가 서투른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린 시절 애착형성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자아는 불안이나 결핍감 등을 학습한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이나 통제, 질책, 비난, 폭언 등으로 상처를 입게 되면
우리 무의식 속 내면 아이는 불안, 두려움, 분노, 의심 등의 감정이 깊이 잠재되어 버린다.
이 맘, 저 맘 이렇게나 복잡한 게 우리 마음인데 눈에 보이지 않기에 몸 커 가듯이 마음도 자연히 커 간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언제
마음 돌보는 법을 한 번이라도 배우기나 했던가
하물며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을 '몸 아프다'는 말처럼 쉽게 할 수는 있던가. 아이러니하다. 이런 아이러니함을 중학교 때부터 느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우리는 선생님들 말하는 걸 받아 적기만 해야 하는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 선생님 같은 멘토가 현실에는 왜 없는 건지. 주입식 사회가 그때부터 답답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대화나 공감이 더 필요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무조건 벌주기와 징계만 남발하는 교육환경에 온기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 좋은 선생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극히 드물었다.
질문하고 답하는 자유로운 교육환경이 결국은 내 마음을 말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묻고 이해하는 소통능력에도 결국 직결된다. 왜 수학이 먼저고 영어가 먼저지? 소통에 미숙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추측과 오해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담아놓기보다 꺼내놓는 게 더 수월해지면 마음의 무게도 세상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물어보고 내 마음은 이렇다고 말하면 상처도 좀 더 가볍게 꺼내놓고 풀어갈 수 있다.
내면 아이는 무의식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은밀히 감추어진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상황들과 마주하게 되면 의식보다 먼저 반응을 한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들을 똑같이 혹은 더 강렬하게 소환하게 된다. 그 반응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앞뒤 없이 욱하고 올라와 스스로도 통제가 잘 되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내 마음이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가족 안에서 서로 잘 치유되고 회복해가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공격적이고 미숙한 태도로 가족들을 힘들게 해 모두가 상처를 많이 입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현명하게 대처하고 중심을 잘 잡고 극복해 낸다. 아버지 역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경우 아이도 성인이 되어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피하거나 좌절하기보다 해결하고 극복해내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상처나 고통 자체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해낸 부모님의 대처방식과 태도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 뇌는 극복을 하나의 성취경험으로 잠재의식 속에 강력하게 각인하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 극복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