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직원 콤플렉스

상사와 선배에게 순응하면서 착한 후배가 되려는 경향

by 정어리

“다음에 인사 면담하면 평가를 개떡같이 줘도 좋으니 술만 안 마시면 해달라고 말해야겠어.” 대화방의 동기들에게 톡을 보냈다. 지난 금요일 저녁 팀 선배의 승진턱을 얻어먹고 술병으로 토요일 내내 몸져누웠다. 차라리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고 몸살이 난 거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삶의 의지가 밥맛처럼 뚝 떨어진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회사는 그냥 목숨만 부지한다는 생각으로 다녀야겠다고 말했다. 동기들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회식에 안 가겠다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또 다른 친구는 동기 중에 빨리 승진한 편인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멘트라고 했다. 맞는 말 좀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는데 차라리 속은 후련했다.


아! 정말이지 거절은 힘들다 (출처 : 직접 그림)


어쩌다 보니 능력과 상관없이 ‘운빨’로 승진했다. 급여가 올라서 좋다. 한편으로 이제는 창업을 하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이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과장이 되어 이직하는 사람은 아직 주변에서 보질 못했다. 그만두는 것도 대리까지다. ‘원 클럽 맨’으로 커리어를 마감하는 프로축구 개념인 건가. 리오넬 메시는 이적할 수 있는 데 안 하는 거다. 나는 이직할 능력이 없다. 데려가겠다는 곳도 없다. 왜 동기보다 빨리 승진했을까 이유를 찾아봤다. 세 가지 정도 요인이 있는 것 같다. 운이 엄청나게 좋다. 남의 말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술이 약하지만, 잘 받아먹는다. 승진 욕심은 많지 않은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세상에 회식 강요는 갑질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것은 맞다. 상사들도 회식하자는 말을 꺼내기를 부담스러워한다. 특히 코로나 시국인 지금은 5인 이상 모임 금지 지침도 철저히 지키고 신경 쓴다. 그들도 요즘 젊은것들의 정서나 방역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한 번, 모처럼 만에 회식을 하자고 한다면 거절하기 어렵다. 어떤 유튜브를 보면 인턴사원이 내가 ‘짱’인 사람만 즐거우니까 회식을 하는 거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회식은 단순히 술이 좋아서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윗분들 뜻을 아니까 후배 입장으로서 거절하기가 어렵다고 변명해본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아니라 착한 직원 콤플렉스다.


본인이 좋다고 받아먹는 술이라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출처 : 직접 그림)

상사의 지시나 부탁은 거스르기 어려운 부모님 말씀과도 같다. 집에서도 착한 아들이 되려고 노력한다. 살가운 성격은 못된다. 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잘 따른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지만, 두렵다. 한창 반항기 때 부모님은 말을 듣지 않으면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직장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해고다. 월급이 끊긴다. 아무려면 일을 안 하겠다고 하면 몰라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직원을 자를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코끼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뚝에 묶여 지내는 코끼리. 신입사원 때부터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술을 거절할 힘이 없다.


나의 작은 주량을 감안해서 쟁여둔 두세 달 치 미니 맥주들. 술병이 나서 앞으로도 당분간 마실 일이 없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2017년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 989명에게 회식 참여로 인한 불이익을 조사했다. 1위는 부서 내에서의 은근한 소외감이다.(57.9%) 2위는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히는 일이다.(57.4%) 3위는 상사의 질책이다.(30.1%) 4위는 회사 내 중요 이슈에서 소외되는 일이다.(24.1%) 5위는 승진 등 인사고과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다.(22.7%) 1위부터 5위까지 모든 불이익을 받는다고 상상해본들, 매달 월급만 받는다면 회식을 빠질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을 것 같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도 회식은 거절 못하는 내가 동기들이 보기에는 재수 없나 보다. 말하자면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이다.


술만 없으면 아무래도 좋은데 그런 회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해서 음주 강요만 없으면 회식은 아무래도 좋다. 단합이 실제로 되든지 말든지 술 없이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참석의 의무를 다하련다. 소맥 대신 제로 콜라를 마시면서 회식비를 축내겠다. 술 없이는 회식을 할 수가 없으니 현실성이 없는 바람이다. 과음 당일의 구토, 이틀을 넘기는 끔찍한 두통, 왜 사는가에 대한 깊은 회한을 감내한 덕분에 지금까지 예쁨을 받았다 해도 좋다. 못된 직원이 될지언정 이제는 나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고 싶다. 집안 대소사를 외워 둘러대라. 특정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는 앱을 사용하라. 병약한 이미지를 구축하라. 상사의 대리기사를 자처하라. 모두 끝까지 착한 이미지를 지키는 거절법이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선배들의 지혜 중 해답은 ‘단호함’이었다.(웃으면서 단호할지 말지는 선택이다.) 헤럴드경제에 직장 신공을 연재한 김용전 커리어 컨설턴트는 말했다. “좋은 이미지를 다 가지려고 하는 게 문제다. 술에 대해서는 악평을 받아도 상관없다.” 나름대로는 꾸준히 주변에 어필해왔다. “술은 거의 회사에서만 마신다." "집에서는 맥주 한 캔도 못 마시고 반을 버린다." "술을 안 좋아한다.”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거절 못한 책임도 있다. 미움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나. 올해는 선택적 악역이 되어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모든 사람에게 끝까지 착한 사람은 결국 나쁜 놈이 될 테니.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에 의한 한글 표시사항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인 폭락장 속에서 머니게임을 보았다